*
시집을 손에 잡고
끝 페이지까지 단숨에 읽었다.
이철 시인의 첫 시집 『단풍 콩잎 가족』.
시가 이렇게 솔직해도 괜찮은가?
시를 이렇게 슬프게 써도 되는가?
처음부터 끝까지 온몸으로 쓴 시인의 시가
내 몸에 콕콕 박혀 아프다.
며칠 쉬었다가 다시 한 번 읽고
몇 편 소개해 본다.
달팽이처럼 느리고,
슬프고 안타깝게 걷는 시인이
우리를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위로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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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시 / 이철
어제는 사랑이 그리워
눈길을 걷다가
눈으로 꽃을 만들고
눈으로 사람을 만들다,
눈사람이 되어
돌아왔다
오늘은 사람이 그리워 시를 쓴다
사람 사는 세상에
사람이 그리워
눈물로 시를 쓰고
눈으로 덮어주었다
*
누나가 주고 간 시 / 이철
112-2119-1212-09 부산은행 이진희
철아 누야다
3만 원만 부치도라
미안타
택배 일 하다 늦게 본 문자
시집 내려면 출판사에 300만 원
함진아비 함지고 가듯 발문에 50만 원
못난 시 시집 보내려고
집사람 몰래 3년간 모은 돈 250만 원
해병대 출신 자형 만나 아들 둘 낳고
반여2동 새벽별 아래 찬송가를 부르며
하루에 한 바퀴 여리고성을 도는 누나
그 누야한테 멀쩡한 돈 5만 원을 보냈다
시가 좀 모여도
돈 없으면 시한테 미안하고
점심값 아껴가며 돈을 좀 모아놓고도
시가 안 써지는 장마철
누나가 시 한 편 주고 갔다
단돈 5만 원에
*
단풍 콩잎 가족 / 이철
암포젤M으로 몇 년을 살다가
제초제로 생을 마감한
아버지를 뒷산 살구나무 아래 묻고
형과 누나와 나와 어머니와
우리는 그렇게 몇 달을
콩잎 가족으로 살았습니다
이제 집에는 선반 위 그 하얗게 달던
아버지의 암포젤M도 없고
아버지 윗도리 속의 세종대왕 백 원도 없고
찬이라곤 개다리소반 식은밥 곁에
돈다발처럼 포개진 삭은 콩잎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밥술을 대면
가만히 몸을 누이던
단풍 콩잎 가족
*
옴마가 다녀가셨다 / 이철
철아, 옴마다
개줄에 자꾸 넘어지가꼬
고마 매느리가 사다 준 개 안 팔았나
서 서방하고 희야 왔다 갔다
철아, 듣고 있나
오늘 장날 아이가
빠마나 할라꼬
철아,
니는 댕기는 회사 단디 잘하고 있제
니 친구 영두 저그 아부지 죽었다
초상칫다
너그 옴마도 인자 울매 안 남았다
뭐라쿠노
시끄러바서 니 소리 잘 안 들린다
우짜든지 단디 해라
알긋제
끈는다이
나는 한마디도 안 했는데
회사 그만둔 지 석 달이 넘었는데
어머니가 편히 다녀가셨다
*
아버지와 니기미 / 이철
아버지는 니기미럴! 입에 달고 살았다
지금의 나보다 다섯 살이 적은 겨울 초입
아침 밥상머리에서 자살할 때까지
아버지는 니기미를 게거품처럼 입에 물고 다녔다
풍년 든 들판 허수아비 바라보며 니기미
언 대동 경운기 대가리에
뜨건 물 한 바가지 부어주며 니기미
그 니기미 한마디에
소 판 돈 떼먹고
서울로 난 친구 놈도 용서하고
손바닥에 퉤 가래침 뱉고
녹슨 조선낫 갈아 쥐고
니기미 니기미 오르던 뒷산
배를 쓸며 암포젤M을
니기미처럼 입가에 묻히고는
아까시 뿌리와 조석으로 싸우던 아버지
죽여도 죽여도 오뉴월
아버지의 아버지 무덤 위에 니기미로 핀
아까시꽃 들판에 기어이
학생광주이공휘종판지묘로 누워 계시다
*
달팽이 6 / 이철
연말 시인 모임에 갔었습니다
가히 물 반 고기 반이었습니다
시상이 있었고 시국 성토가 있었습니다
밥과 술이 오갔고 사이사이 안주처럼
욕새과 삿대와 시비가 있었습니다
그런 중 점잖은 한 분이 중심을 잡고
-시인은 시로써 말하는 겁니다
그러자 닁큼 그 말씀 불태우며
-저런 개새끼, 시인은 삶으로 말하는 거야
나는 여태 저런! 개새끼로 살았습니다
*
달팽이 9 / 이철
인생을 풀처럼 나무처럼 살다 가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인생을 꽃처럼 새처럼 살다 가는 것은 참 힘든 일입니다
그래도 인생을 사람처럼 살다 가고 싶은 사람은 있어
황간면 황간역 무궁화호 상행 열차가 하루에 일곱 번 지나갑니다
당신도 인생을 바람처럼 이슬처럼 살다 가고 싶습니까
당신도 인생을 물처럼 구름처럼 살다 가고 싶습니까
아직도 인생을 사람처럼 살다 가고 싶은 사람은 있어
오늘도 황간면 황간역 무궁화호 하행 열차가 여덟 번 지나갑니다
*
모국어 / 이철
우시장으로 소풍 가는 제 새끼를 바라보며
음매- 하는 말은
어미 소가 해줄 수 있는 눈짓의 전부
소장수 트럭에 묶여 주인 쪽으로
음매- 하는 말은
소가 배운 말의 전부
도축장 시멘트 바닥에 무릎을 꿇고
마지막 끼니를 게워내며
음매- 하는 말은
이 세상에 대하여
소가 할 수 있는 몸짓의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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