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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 소개

몸으로 쓴 『단풍 콩잎 가족』

by 정가네요 2021. 8. 12.

*

시집을 손에 잡고

끝 페이지까지 단숨에 읽었다.

이철 시인의 첫 시집 『단풍 콩잎 가족』.

시가 이렇게 솔직해도 괜찮은가?

시를 이렇게 슬프게 써도 되는가?

처음부터 끝까지 온몸으로 쓴 시인의 시가

내 몸에 콕콕 박혀 아프다.

며칠 쉬었다가 다시 한 번 읽고

몇 편 소개해 본다.

달팽이처럼 느리고,

슬프고 안타깝게 걷는 시인이

우리를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위로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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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시 / 이철

 

어제는 사랑이 그리워

눈길을 걷다가

눈으로 꽃을 만들고

눈으로 사람을 만들다,

눈사람이 되어

돌아왔다

오늘은 사람이 그리워 시를 쓴다

사람 사는 세상에

사람이 그리워

눈물로 시를 쓰고

눈으로 덮어주었다

 

 

*

누나가 주고 간 시 / 이철

 

112-2119-1212-09 부산은행 이진희

철아 누야다

3만 원만 부치도라

미안타

택배 일 하다 늦게 본 문자

시집 내려면 출판사에 300만 원

함진아비 함지고 가듯 발문에 50만 원

못난 시 시집 보내려고

집사람 몰래 3년간 모은 돈 250만 원

해병대 출신 자형 만나 아들 둘 낳고

반여2동 새벽별 아래 찬송가를 부르며

하루에 한 바퀴 여리고성을 도는 누나

그 누야한테 멀쩡한 돈 5만 원을 보냈다

시가 좀 모여도

돈 없으면 시한테 미안하고

점심값 아껴가며 돈을 좀 모아놓고도

시가 안 써지는 장마철

누나가 시 한 편 주고 갔다

단돈 5만 원에

 

 

*

단풍 콩잎 가족 / 이철

 

암포젤M으로 몇 년을 살다가

제초제로 생을 마감한

아버지를 뒷산 살구나무 아래 묻고

형과 누나와 나와 어머니와

우리는 그렇게 몇 달을

콩잎 가족으로 살았습니다

이제 집에는 선반 위 그 하얗게 달던

아버지의 암포젤M도 없고

아버지 윗도리 속의 세종대왕 백 원도 없고

찬이라곤 개다리소반 식은밥 곁에

돈다발처럼 포개진 삭은 콩잎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밥술을 대면

가만히 몸을 누이던

단풍 콩잎 가족

 

 

*

옴마가 다녀가셨다 / 이철

 

철아, 옴마다

개줄에 자꾸 넘어지가꼬

고마 매느리가 사다 준 개 안 팔았나

서 서방하고 희야 왔다 갔다

철아, 듣고 있나

오늘 장날 아이가

빠마나 할라꼬

철아,

니는 댕기는 회사 단디 잘하고 있제

니 친구 영두 저그 아부지 죽었다

초상칫다

너그 옴마도 인자 울매 안 남았다

뭐라쿠노

시끄러바서 니 소리 잘 안 들린다

우짜든지 단디 해라

알긋제

끈는다이

나는 한마디도 안 했는데

회사 그만둔 지 석 달이 넘었는데

어머니가 편히 다녀가셨다

 

 

*

아버지와 니기미 / 이철

 

아버지는 니기미럴! 입에 달고 살았다

지금의 나보다 다섯 살이 적은 겨울 초입

아침 밥상머리에서 자살할 때까지

아버지는 니기미를 게거품처럼 입에 물고 다녔다

풍년 든 들판 허수아비 바라보며 니기미

언 대동 경운기 대가리에

뜨건 물 한 바가지 부어주며 니기미

그 니기미 한마디에

소 판 돈 떼먹고

서울로 난 친구 놈도 용서하고

손바닥에 퉤 가래침 뱉고

녹슨 조선낫 갈아 쥐고

니기미 니기미 오르던 뒷산

배를 쓸며 암포젤M을

니기미처럼 입가에 묻히고는

아까시 뿌리와 조석으로 싸우던 아버지

죽여도 죽여도 오뉴월

아버지의 아버지 무덤 위에 니기미로 핀

아까시꽃 들판에 기어이

학생광주이공휘종판지묘로 누워 계시다

 

 

*

달팽이 6 / 이철

 

연말 시인 모임에 갔었습니다

가히 물 반 고기 반이었습니다

시상이 있었고 시국 성토가 있었습니다

밥과 술이 오갔고 사이사이 안주처럼

욕새과 삿대와 시비가 있었습니다

그런 중 점잖은 한 분이 중심을 잡고

-시인은 시로써 말하는 겁니다

그러자 닁큼 그 말씀 불태우며

-저런 개새끼, 시인은 삶으로 말하는 거야

나는 여태 저런! 개새끼로 살았습니다

 

 

*

달팽이 9 / 이철

 

인생을 풀처럼 나무처럼 살다 가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인생을 꽃처럼 새처럼 살다 가는 것은 참 힘든 일입니다

그래도 인생을 사람처럼 살다 가고 싶은 사람은 있어

황간면 황간역 무궁화호 상행 열차가 하루에 일곱 번 지나갑니다

당신도 인생을 바람처럼 이슬처럼 살다 가고 싶습니까

당신도 인생을 물처럼 구름처럼 살다 가고 싶습니까

아직도 인생을 사람처럼 살다 가고 싶은 사람은 있어

오늘도 황간면 황간역 무궁화호 하행 열차가 여덟 번 지나갑니다

 

 

*

모국어 / 이철

 

우시장으로 소풍 가는 제 새끼를 바라보며

음매- 하는 말은

어미 소가 해줄 수 있는 눈짓의 전부

소장수 트럭에 묶여 주인 쪽으로

음매- 하는 말은

소가 배운 말의 전부

도축장 시멘트 바닥에 무릎을 꿇고

마지막 끼니를 게워내며

음매- 하는 말은

이 세상에 대하여

소가 할 수 있는 몸짓의 전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