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천의 권숙월 시인께서 열네 번째 시집을 내셨습니다.
나이 칠십이 되면 하고 싶은 대로 해도 아무것도 거리낄 것이 없다고 했는데 노시인의 삶이 참으로 느긋하고 행복해 보입니다.
『금빛 웃음』, 시인의 말씀처럼 웃음이 사라지고 있는 고단한 세상에서 이 시집의 시들이 풍매화 꽃가루처럼 세상에 널리 퍼져 나가길 빕니다.
자연에 대한 서정과 가족에 대한 사랑이 가득한 편안히 읽히는 산문시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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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수유 봄 일기 / 권숙월
2020년 봄, 시민탑 옆 산수유나무 머쓱하다 웃음 띤 얼굴로 바삐 오가던 사람들 모두 어디로 갔는지 애써 봄소식 전해도 멈 추어줄 발길이 없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봄이 초상집 분위기인가 끝이 보이지 않는 걱정거리가 생긴 듯 말 불일 수 없 이 어둡다 이렇게 적막한 봄이 어디에 있었으랴 미세먼지 자욱 한 날도 이러지 않았는데 행인들 하나같이 마스크를 썼다 소독 약 냄새가 꽃향기를 이긴다 멋모르고 미소 짓던 산수유나무가 계절을 잃은 시간처럼 헛헛하다
* 씀바귀 꽃 / 권숙월
해맞이 꽃이다 어둠을 이기며 해를 맞는 꽃이다 입에 쓴 잡초 라고 외면하면 안 되지 달이 찾아와도 눈길 준 적 없는 씀바귀, 쓴 소리 내지 못하는 꽃을 피웠다 우리집 잔디밭의 씀바귀 꽃 혼자 보기 아깝다 가까운 사람들 연락해야지 생각한 것이 퇴근 해서 보니 모두 지고 없다 아무 때나 피는 꽃이 아니라는 걸 미 처 몰랐다 그러던 이튿날 해 뜰 무렵 꽃바다를 이루었다 빛나는 일 하고도 낯낼 줄 모르는 사람 같아 멀리서 느껴지는 향기가 예 사롭지 않다
* 백일 붉은 꿈 / 권숙월
‘권불십년 화무십일홍’이라 하였으나 백일 붉은 꽃이 있어 그 앞에 고개를 숙인다 한여름 땡볕과도 당당히 맞서는 저 비장한 정신은 어디서 나온 걸까 늦가을 무서리에도 꽃 보여주기를 그 치지 않는 호연지기로 된서리에 밀려날 때까지 작은 꽃밭을 지 킨다 난생처음 뿌려본 백일홍 꽃씨 모두 쭉정이 같아 싹 틔울 수 있을까 걱정했으나 그게 아니었다 작지만 위대한 힘으로 백일 붉은 꿈을 펼쳤다 이토록 갸륵한 꽃씨까지 한 봉지 전해주었다
* 지갑 / 권숙월
아내의 지갑에는 주민등록증 둘이 정겹다 하나는 자기 것이 고 다른 하나는 팔 년 전 하늘 길 오른 친정아버지 것이다 아내 에게 주민등록번호를 묻자 지갑을 열어 보여 알았다 부녀간의 정 오롯한 주민등록증, 지갑이 열릴 때마다 혼자 안온했겠다 올 해 여든 여덟 마을 최고령인 친정어머니도 아시겠지 주민등록증 을 맏딸이 차지한 것, 잔정 많은 아버지 목소리 얼마나 듣고 싶 었으면 손때 묻은 주민등록증을 지갑에 간직할까 더 살가운 딸 로 살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을까 가난하지 않은 아내의 지갑 이 시 한 편 쓰게 한다
* 성질 하고는 / 권숙월
급하디 급한 성질이 죽음을 앞당긴다 갈치 밴댕이의 급한 성 질, 바다도 어쩌지 못한다 갈치는 잠잘 때도 신경의 날이 시퍼렇 게 서 있다 바닷물에 칼 꽂은 채 서서 자는 갈치는 잡히기 바쁘 게 자진한다 제 성질 이기지 못하여 까무룩 숨이 넘어간다 밴댕 이는 그물에 걸리기만 해도 파르르 떨다 죽는다 소갈머리 좁은 밴댕이는 찍소리 못하고 아기미를 닫는다 등 돌릴 수 없는 생명 의 무한한 섭리여! 가없는 바다도 갈치 밴댕이의 급한 성질 바꿀 수 없어 파도 소리만 한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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