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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 소개

엄마의 크기 -『원더우먼 윤채선』

by 정가네요 2020. 12. 27.

*

엄마는 얼마만한 존재일까요?

가만히 생각해보니 엄마는 모두였습니다.

#피재현 시인은 그 엄마의 이름을 세상에 널리 알렸습니다.

이름 없이 한 평생을 산 엄마의 이름을...

그 엄마의 이름은 『원더우먼 윤채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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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바람처럼 / 피재현

 

아주 잠깐 사이 풍을 맞아

말씀이 어눌해진 엄마를 병실에 눕혀 놓고

수발드는 봄날

 

나물국에 밥 말아 먹은 엄마는

입가에 이팝꽃처럼 붙은 밥알도 떼어 내기 전에

약을 찾고

혈압약, 뇌경색약, 우울증약

인사돌, 영양제, 변비약까지 한 손바닥

가득 쌓인 약 알갱이

두 번에 나눠 삼킨다

 

내가 빨리 죽어야 니가 고생을 않을 텐데

말로만 그러고 죽을까 봐 겁나서

꽃잎 삼키듯 약을 삼킨다

 

병실 창밖 한티재에는 산살구꽃도 지고

마구마구 신록이 돋아나는데

엄마가 오래오래 살면 어쩌나

봄꽃 지듯 덜컥 죽으면 어쩌나

 

내 마음이 꼭 봄바람처럼

지 맘대로 분다

 

 

* 입원 / 피재현

 

우리 엄마를 잘 부탁해요

키는 작지만 한때 사람 키만 한 우엉 뿌리를

쑥쑥 뽑아 올렸어요

내 참 기가 막혔거든요

지심 뽑느라 손마디가 휘고 더덕 같지만

우리 마을에서는 칼국수의 달인으로 통했어요

그 일정한 두께며 칼질이라니

지금은 몹쓸 병에 걸렸어요

약을 안 먹으면 손을 떨어요 이빨도 다 빠지고

무릎 연골을 갈고 귀도 점점 어두워지네요

간호사님들 우리 엄마를 잘 부탁해요

반말을 해도 좋아요 소리를 질러도 좋아요

그러나 엄마 팔에 주삿바늘을 꽂을 때는

소아과에서처럼 친절하게 엄마를 얼러 주세요

회진을 돌 때는 엄마처럼 작은 키가 되어서

엄마의 눈을 들여다봐 주세요

그러면 엄마는 어린아이처럼 수줍게 웃을 테고

앞니 없이 웃을 때의 그 귀여움이라니

우리 엄마를 잘 부탁해요 간호사님들

 

 

* 소반에 콩 고르듯이 / 피재현

 

엄마 옆 침상의 할머니는 엄마보다 열 살이

많아서 올해 아흔한 살이고

엄마의 병동에서 오 년 차 왕고참이다

 

어제도 오늘처럼 가을비가 내렸고

앞방 할배 한 분이 돌아가셨다는데

엄마가 꼭 죽은 어매 같다는 왕고참 할머니는

재밌다는 듯 껄껄 웃으면서 어제 죽은

영감 이야기를 시작했다

 

둘 내외가 같이 들어왔는데요

치매 걸린 할망구를 그 영감이 때때로

들여다보고는 죽을상이 되어서는 제 방으로

가곤 했는데요

한 며칠 안 보이더니 어제 죽었어요

좀 덜 바쁠 때 죽지, 꼭 명절 앞두고 바쁠 때

많이들 죽어요

여기는요

 

소반에 콩 고르듯이 사람이 죽어 나가요

저 보소 저 할망구

지 서방 죽은 줄도 모르고 뭐가 좋아서

또 춤을 추네요

 

소반에 올라앉은 콩처럼

여섯 할망구가 들어앉은 요양병원 병실에서

나는 모두들 실한 콩이 되어 오래오래

소반 위에 앉아 계시라고

두유 한 통씩을 돌리고는 엄마 자리로 돌아와

엄마는 아직 실한 콩인가 한참 들여다보았다

 

 

* 별이 빛나는 감나무 아래에서 / 피재현

 

아버지는 가을이 깊어지면 감 따러 오라고

성화를 부렸다

나는 감 따는 게 싫어 짜증을 냈다

 

내가 얼마나 바쁜 사람인지 아느냐고

감 따위 따서 뭐 하냐고

 

아버지 돌아가시고 다시 가을이 왔을 때

엄마는 내게 말했다

니 애비도 없는데 저 감은 따서 뭐 하냐

 

나는 별이 빛나는 감나무 아래에서

톱을 내려놓고 오래도록 울었다

 

 

* 포옹 / 피재현

 

누가 나를 좀 안아 줘

나와 같은 체온이

내 밖에

또 있다는 것을

알려 줘

 

 

* 빈혈 / 피재현

 

울고 나면 속이 시원해진 적 있었지요

아부지 죽고 한 열흘 지나 새벽에 일어나

엉엉 울었지요 아내 몰래 뒷방으로 가서

 

퍼질러 앉아 울고 나니 말갛게 해가 떴지요

어느 해 여름에는 파도치는 바닷가

빈혈로 노래진 등대를 붙잡고 펑펑 울었지요

그날은 하루 종일 울어서 해거름에는

나도 슬쩍 빈혈이 왔었지요

 

모과꽃 한창일 때 엄마 죽고 검은등뻐꾸기는

새벽마다 곡을 하는데 눈물이 안 나요

빨리 울어야 할 텐데 그래야 엄마도 날

용서할 텐데 그 많던 눈물은 다 어디로 갔을까

 

모과는 그사이 젖살이 올라

제법 대추 알만큼 컸는데 눈물이 안 나요

엄마랑 문지방에 나란히 앉아 먹던

쑥떡 생각 자꾸 나서 목만 막히고 눈물이 안 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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