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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 소개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 / 유시민

by 정가네요 2015. 1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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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의 글쓰기 특강 / 생각의길

 

  

 

 

나는 우리말의 가장 큰 매력이 토씨에 있다고 생각한다. 토씨는 뜻을 압축해서 전하는 수단이며 문장에 감칠맛이 돌게 만드는 조미료이기도 하다. 다양한 토씨를 적절하고 정확하게 쓰는 아이는 언어 능력이 뛰어난 어른이 된다. 우리말에는 주어를 만드는 다양한 토씨가 있다. ‘이’ ‘가’를 많이 쓰지만 맥락에 맞추어 ‘은’ ‘는’ ‘도’를 쓰기도 한다.

소개팅을 하고 온 어떤 여자한테 ‘절친’이 이렇게 물었다고 하자. ‘그 남자 어때?’ 대답은 네 가지가 있다. ‘키도 커’ ‘키는 작아’ ‘키는 커’ ‘키도 작아’. 이 네 가지 대답 모두에서 토씨가 핵심 정보를 전달한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키도 커’는 이런 뜻이다. 그 남자 돈 많고 교양 있고 직장 좋고 심지어 키도 커. ‘키는 작아’는 괜찮지만 그보다는 조금 못 할 때 쓴다. 그 남자 돈 많고 교양 있고 직장 좋은데 아쉽게도 키는 작아. ‘키는 커’는 이렇게 해석해야 한다. 그 남자 돈 없고 교양 없고 직장 시원치 않은데 키는 커. ‘키도 작아’는 달리 해석할 여지가 없다. 그 남자 돈 없고 교양 없고 직장 시원치 않은 데다 키도 작아. 토씨는 이렇게 쓰는 것이다. 단 한 글자 토씨에 이렇게 많은 뜻을 담을 수 있다.(p191)

 

‘모양’은 겉으로 보는 생김새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 뜻이 있는 단어는 ‘모양’ 말고도 많다. ‘모습’ ‘자태’ 꼴‘ ’꼬락서니‘ ’몰골‘ 같은 말이다. 느낌이 좋은 순서대로 배열하면 자태-모습-모양-꼴-꼬락서니-몰골이 된다. 이 여섯 단어를 잘 어울리는 다른 단어와 묶어보자. 천사처럼 고운 자태, 사나이다운 모습, 여러 가지 모양, 지저분한 꼴, 한심한 꼬락서니, 비참한 몰골, 이렇게 된다. 서로 무늬가 잘 어울리는 또는 궁합이 맞는 조합이다. 이렇게 어울리는 단어를 조합해 뜻을 정확하게 표현하면 좋은 문장이 된다. 천사 같은 꼬락서니, 비참한 자태, 사나이다운 몰골은 어떤가? 한마디로 불행한 만남이다. 이렇게 어울리지 않는 단어를 조합하면 문장은 엉망이 되고 뜻을 전하기도 어렵다.

다른 예를 하나 더 보자. ‘죽었다’는 말에는 특별한 감정이 묻어나지 않는다. 반면 ‘타계했다’ ‘별세했다’ ‘돌아갔다’ ‘숨을 거두었다’ '떠났다‘는 존경과 애도와 아쉬움이 묻어난다. 그래서 ’돌아가셨다‘ ’떠나셨다‘와 같이 존칭으로 쓰는 경우가 많다. 비하하고 조롱하는 감정이 든 단어도 있다. ’밥숟가락 놨다‘ ’뒈졌다‘ ’골로 갔다‘ 같은 것이다. 죽은 사람이 누구이며 그 사람에 대한 감정이 어떠냐에 따라 단어 선택이 달라진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자연스럽다. ’독재자 영감탱이가 뒈졌다‘도 괜찮다. ’내 친구가 밥숟가락 놨어‘는 전후 사정에 따라서 자연스러울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랑하는 남편이 골로 갔다‘는 확실히 어색하다.

우리는 어휘의 무늬 또는 늬앙스를 특별히 배우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말을 익힐 때 문장 안에서 단어를 익혔기 때문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표현을 만나면 저절로 어색한 느낌을 받는다. 어색하게 들리는 말은 사람들이 쓰지 않는 말이다. 그런 말은 나도 쓰지 않는 게 현명하다.(210)

 

글쓰기는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행위다. 물론 글쓰기만 그런 게 아니라 사람 하는 일이 다 그렇다. 우리는 자신을 표현하는 행위로 인생을 채운다. 내면에 있는 생각, 감정, 욕망을 제때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면 삶이 답답해진다. 각자의 내면에 무엇이 있으며 또 어떻게 그것을 표현하느냐에 따라 사람의 인생이 달라진다.(257)

 

기술만으로 훌륭한 글을 쓰지 못한다. 글 쓰는 방법을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내면에 표현할 가치가 있는 생각과 감정이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훌륭한 생각을 하고 사람다운 감정을 느끼면서 의미 있는 삶을 살아야 그런 삶과 어울리는 글을 쓸 수 있게 된다. 논리 글쓰기를 잘하려면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떳떳하게 살아야 한다. 무엇이 내게 이로운지 생각하기에 앞서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지 고민해야 한다. 때로는 불이익을 감수하고서라도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원칙에 따라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기술만으로 쓴 글은 누구의 마음에도 안착하지 못한 채 허공을 떠돌다 사라질 뿐이다.(2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