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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 소개

꽃 피는 삶에 홀리다 / 손철주

by 정가네요 2015. 3. 12.

*

 

 

손철주 / 오픈하우스

 

 

* 차례

 

1장 꽃 피는 삶에 홀리다
꽃은 피고 지고│좋은 것 두고 떠나는 게 인생이야│자태는 기록하지 않는다│향기는 가고 냄새는 남다│없는 곳에 있는 사람들│죽은 개와 산 부모│삼 세 판이라고│호랑이 등에 탄 아내여, 내려오라│예쁜 남자│한 가지 일, 한 마디 말│내 사랑 옥봉│시들어버린 연꽃│우연은 누구 편인가│닿고 싶은 살의 욕망│사랑은 아무나 하고, 아무 때나 해라│지곡마을의 쪽빛 농사│침묵 속으로 달리다│옛사람의 풍경 하나│묘약을 어디서 구하랴│얘야, 새우는 너 먹어라│값비싼 민어를 먹은 죄│‘누드 닭’의 효험│이중섭의 소가 맛있는 이유

2장 사람의 향기에 취하다
지나가는 것이 지나가는구나│연꽃 있는 사랑 이야기│입 다문 모란, 말하는 모란│방 안에 꽃 들여 놓으시지요│옷깃에 스친 인연│참 애석한 빈자리│부드럽고 구수하고 어리석고 아름다운│동풍에 쫓기는 배꽃 만 조각│살아도 산 목숨이 아니었구나│잊혀진 화가, 잊을 수 없는 사람│붓에게 띄우는 오래된 사랑가│산을 떠났나, 산이 떠났나│쪽빛 바다에 떠도는 한 조각 붉은 마음

3장 봄날의 상사相思를 누가 말리랴
마음이 없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는다│오백 년 조선의 마음을 적신 시·서·화│속 깊은 선비의 못생긴 그림│산 자의 절망은 바다에서 깊어진다│봄날의 상사相思는 말려도 핀다│조선 백자 달항아리│게걸음 하는 사람│좀팽이들은 물렀거라│와사비 대신 버터│캐보나 마나 자주감자│애틋한 자매│내가 매력을 느낀 남자가 있냐고?│천하는 아무 일이 없다│영원을 부러워하지 않는 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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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바다의 색은 중구난방이다.

에메랄드이건 코발트블루이건 울트라마린이건, 바다는 정작 색의 명명을 개의치 않는다.

이 땅의 예술인이 가장 즐겨 일컫는 바다색은 쪽빛이다.

쪽빛은 하늘색이기도 하다.

통영의 하늘과 바다는 쪽빛, 그 알 듯 모를 듯한 색의 웅숭깊음으로 예술가를 번민하게 한다.

쪽빛으로 물들인 모시를 보고 타관의 소설가 조정래가 이렇게 썼다.

"가슴을 짜르르 울리는 전율과 함께 무언가 깊게 사무치는 감정을 일으키는 그 쪽빛을 무어라 해야 할까.

그건 깊고 깊은 바다에서 금방 건져올린 색깔이었고, 차고 시려서 더욱 깊고 푸르른 겨울 하늘을 그대로 오려낸 것이었다.

그 쪽빛 모시필은 찬바람에 펄럭이고 나부끼며 겨울 하늘로 변해가는가 하면, 바라볼수록 처연하고 한스러운 감정에 사무치게 하는 것이었다."

 

쪽색을 만드는 전통 염장에게 물어도 답은 시원치 않다.

내가 아는 염장은 쪽색을 '청도 아니요, 벽도 아니요, 남도 아닌 까마득한 색'이라고 설명한다.

까마득하다니, 이야말로 바다도 아니요, 하늘도 아니요, 꿈결도 아니요, 그렇다고 슬픔이나 처연함이나 한스러움도 아닌, 오리무중이란 말 아닌가.

실로 언어도단이자 어불성설이 쪽색이라고 천연덕스럽게 말하고 있다.

천하의 문인들도 쩔쩔맨 이름 짓기를, 그 색을 만들어내는 염장조차 까마득하다고 말한 쪽색의 정체를, 무슨 용빼는 재주가 있어 규정하겠는가.

쪽색은 수식을 도로에 그치게 만드는 냉혹한 운명을 타고 태어난다.

 

쪽빛의 스펙트럼은 넓다.

뉘앙스는 천차만별이다.

서양의 먼셀 표색계가 무색할 정도로 능준하다.

비유를 허용한다면 그 쪽빛의 스펙트럼은 청산리 벽계수에서 비갠 날의 가을 하늘, 흐린 날의 만경창파, 갓 시집온 새아씨의 옥반지, 초가을 햇빛에 빛나는 청자 비색 등으로 천변만화할 것이다.

통영에서 본 쪽색은 제승당으로 가는 길목에서 가장 짙푸러렀다.

꿈엔들 잊지 못할 그 쪽색은 여름의 뙤약볕 아래에서 한 생애를 다 바쳐 빛난다.

 

통영의 쪽빛은 더할 나위 없이 사람들을 위로한다.

세상에서 가장 넓은 바다, 세상에서 가장 넓은 하늘이 바로 쪽빛 아닌가.

통영의 쪽빛은 자연에 안기고픈 모든 이의 염원을 대신하고 있는 셈이다.

 

*

문인들이 사군자를 그린 것은 속된 감정을 씻어내기에 딱 알맞은 소재이기 때문이다.

매화는 겨울을 이기며 봄을 알리는 끈기가 있고, 난초는 깊은 산에서 홀로 향기를 피우는 고결함이 있고, 국화는 서리를 맞으면서도 늦게까지 꽃을 피우는 정절이 있고, 대나무는 북풍한설을 견디는 지조가 있다.

선비는 이런 품성을 본받아 처세한다.

‘매난국죽’을 그리면서 문인은 세상의 풍파를 이겨내는 자신의 세계관을 드러낸다.

 

봄은 덧없다.

오는 듯 가버린다.

그래서 봄은 짧디짧은 황홀이다.

꽃은 황홀경 속에서 핀다.

꽃이 피면 그리움이 맺힌다.

 

당나라의 시 잘 짓는 기생 설도는 「봄 바라는 노래」를 지었다.

꽃이 피어도 함께 즐길 수 없고

꽃이 져도 함께 슬퍼하지 못하니

임 계신 그곳 묻고 싶어라.

 

꽃이 피고 꽃이 질 때는

한 줌의 재로 사위어가도 봄날의 상사는 누가 말려도 핀다.

봄의 짧은 황홀이 있어 추레한 인생을 견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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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끌벅적한 놀이가 끝나면 반드시 적막이 찾아온다.

유쾌하고 화려한 공연을 치른 배우는 무대 뒤에서 남몰래 고독에 젖는다.

열락은 짧고 우울은 길다.

그래서 옛사람이 말했다.

“냉담한 가운데 무한한 풍류가 깃든다.”

풍류도 풍류 나름, 요란한 풍류는 천격의 난장판에 불과하다.

고격의 풍류는 번다하지 않고 고요하다.

 

‘냉담’의 말뜻은 간단치 않다.

‘냉冷’은 그저 차갑고 쌀쌀맞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정신이 번쩍 들거나 깨어 있음에 가깝다.

‘담談’은 싱겁긴 해도 흔들림 없는 평정상태를 이르는 말이다.

떠들썩한 자극에서 떨어져 홀로 깨어 있는 것, 그것이 냉담의 본질이다.

옛사람은 다시 덧붙다.

“천하는 본래 아무 일이 없는데, 어리석은 인간이 저 혼자 시끄럽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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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양수가 그랬던가.

‘인생사 어느 곳이 술잔 앞만 하랴.(人生何處似樽前)’

화가 아닌 나는 술이 그림보다 황홀하다.

그 황홀에 취해 중얼거렸다.

“그런데 말이야. 세상에 더 나은 것이 있기나 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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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란 신통해서 글이 마음에 들면 저자가 남 같지 않다.

본 적도 없는 그가 아는 이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