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물의 이력 / 김상규 / 지식너머
컨베이어 벨트에서 비롯된 선택의 기술
필요한 물건을 충당하는 것은 생활인에게 당연한 일이며 이를 탓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빨리 움직이는 게 몸에 익어버린 것 같아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앞사람이 느릿느릿 걸어가고 있으면 답답해서 참다못하고 무리하게 앞질러 가기 일쑤다. 그나마 이것도 이동 간격이 넉넉할 때나 가능한 이야기다. 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거리에서 옴짝달싹하지 못할 때는 조급증이 생기고 앞사람을 추월하기 위해 고개를 갸웃거리며 기회를 엿본다. 왜 이리 조급해하는 것일까? 눈에 보이지 않는 컨베이어 시스템에 길들여져 느리게 사는 기쁨을 잊어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농장에서 닭, 돼지를 도축하는 시스템에서 아이디어를 가져왔다는 컨베이어 시스템은 백 년이 넘도록 그 효율성을 입증해왔고 이윽고 일상 공간까지 확장되었다. 공장은 사라지지 않았고 설사 사라진다 해도 공장에서 비롯된 시스템은 일상에 스며들어 생산 라인이 물류 라인으로 그리고 선택 라인으로 이어졌다.
오늘날 영화를 예매하거나 책을 주문하고 또는 인터넷 기사를 찾는 행위에서 알 수 있듯이 수많은 정보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양상도 비슷해 보인다. 오랫동안 살펴볼 겨를 없이 쉭쉭 넘겨서 많은 정보를 훑는다. 컨베이어 벨트에서 시작된 효율과 선택의 라인업이 이제는 모바일에서 화면을 넘기면서 선택하는 행동으로까지 확장되었다. 바야흐로 선택의 기술이 중요해진 시대가 된 것이다.
**
강신주의 다상담 / 동녘
고독, 어른의 증거
만약에 어떤 사람이 50대나 60대에 삶의 위기를 겪는다면, 그리고 힘들어한다면, 이유가 뭘까요? 처음 겪기 때문이고, 동시에 그것을 겪기에 너무나 약해져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항상 사람들한테 강조하는 게 젊었을 때 몸 사리면 안 된다는 겁니다. 젊었을 때는 더럽게 힘들어야 돼요. 그게 다 보험이나 연금 같은 거예요. 그러면 나중에 웬만큼 힘들어도 안 힘들어요.
우리가 제일 슬픈 건, 나를 항상 의식한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 이렇게 생각해 보면 돼요. 나를 만난 남자가 자꾸 시계를 봐요. 여러분을 만난 어떤 사람이 시계를 자꾸 본다면, 그건 자기가 지금 어디에 있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고 객관적 위치가 어디인지를 파악하고 있다는 거잖아요. 불쾌하지 않나요? 백화점도 그걸 알아요. 시계 안 갖다 놓죠. 상품에 몰입하라고요. 백화점은 절대로 창문을 만들지 않아요. 비가 쏟아지면 여자들은 본능적으로 집으로 가니까요. 불문율이죠. 백화점은 그렇게 몰입을 위한 환경을 만들어 놓은 겁니다.
고독은 병에 비유하자면 자폐증과 같은 겁니다. 자폐 증상이 있는 아이들은 세계가 너무 큰 충격이 줬을 때 자기 내면으로 들어가 문을 잠가요.
고독은 그런 거예요. 마치 방 안에서 문을 잠그고 있는 것과 같아요. 그런데 그 안에 들어가면 세상이 그림이 돼요. 아이는 바깥이 어떻게 변했는지 모르죠. 안에 들어가 있으면, 평화가 오고 봄이 와도 몰라요. 그래서 그 안에 너무 오래 있으면 안 돼요. 언젠가는 열고 나와야 합니다. 언제 열고 나가죠? 이게 고독한 사람이 가진 일종의 병폐인데요. 밖이 안 보이니까 바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죠. 물론 바깥의 소리는 들려요. 어머니가 혹은 누군가가 그리 해 준다면 좋겠죠. 괜찮다고 계속 안아 주고 따듯하게 대해 줄 때, 언젠가 한번 용기를 낼 수 있을 거예요.
공부 잘하는 놈들은 독한 놈들이에요. 자기를 밀어내는 교재를 억지로 쑤시고 들어간 아이죠. 우리는 그냥 밀리면 밀리거든요. 밀리는 게 자연스럽죠. 몰입이 안 되는데, 무언가를 하는 건 불행한 일이지요. 교재에 억지로 들어가려는 아이는 부모가 평생의 반려자를 지정한 어느 아가씨와 같은 신세라고 할 수 있죠. 이 남자랑 결혼하라고 하니까 그 남자를 계속 쳐다보며 익숙해지려고 노력하죠. ‘내 남편이다. 내 남편이다. 사랑해야 한다. 사랑해야 한다’ 이렇게 자기 최면을 시도하면서요. 어떻게 이 아가씨가 행복할 수 있겠어요. 그러니까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은 성공한 아이가 될 수는 있지만, 행복한 아이가 되기는 힘든 법이죠. 그 아이들이 나중에 보면 다 망가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가 뭘까요? 돈은 잘 벌지만 망가져 있는 느낌이 든다고요.
사랑 앞에서 머리에서 발끝까지 자신을 바꾸려고 하지만, 우리는 단지 그것에만 충실할 뿐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니까요. 우리는 “나를 버리고 ‘사이’가 되어야” 합니다. ‘사이’는 물론 들뢰즈의 개념으로 표현하자면 ‘차이’이겠고, 바디우의 표현을 빌리자면 ‘둘’로도 표현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이제 우리는 압니다. 누군가를 사랑할 수는 있지만,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하도록 강제할 수는 없다는 것, 나아가 그 사람이 나를 떠나는 것도 막을 수 없는 것을. 그래서 하염없이 우리는 기다리는 겁니다. 상대방도 그렇게 자신을 바꿀 수 있을 때까지요. 물론 내가 내민 손을 상대방이 잡아 주었을 때, 우리에게는 기쁨과 행복이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알고 있지요. 그는 언제든지 잡았던 손을 뺄 수 있다는 사실을요.
'좋은 책 소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엄마의 말 공부 (0) | 2015.12.16 |
---|---|
꽃 피는 삶에 홀리다 / 손철주 (0) | 2015.03.12 |
반걸음을 위한 현존의 요구 / 염무웅 (0) | 2015.02.16 |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 / 승효상 (0) | 2015.02.03 |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 장 지글러. - 신자유주의 (0) | 2015.02.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