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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애 시인이
25년 만에 세 번째 시집을 내었습니다.
≪슬픔에도 언니가 있다≫ / 시선사
오랜만에 낸 시집에는
네 살 때 여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자연과 호흡하고 교감하는 시인의 마음이
서정적 언어로 수놓아져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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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연서 / 조정애
아직도 찬바람 불어
빈 가지마다 노을이 이우는데
보내온 매화연서(戀書)에는
새소리 둬 소절도 적어 보냈네
아, 그리우면 남으로 가자
흰머리 헤아리는 너와 나 친구야
거기, 열려오는 초봄의 교회 뜨락
묵향 배인 오래된 마을로 가자
기다림에 지쳐
버선발로 달려오는 봄아
검은 고목에 맺힌 매화 꽃순아
내 머리에 화관을 얹어다오
아득하여라 겨울 어뒤메
내 젊은 꿈이 망울지고
파르라니 떨리는 먼 눈빛에
연분홍 얇은 사랑일랑 묻어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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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선도 / 조정애
친구야
배를 타고 창선에 가자
양철지붕이 붉게 녹슬어 있어도
담부랑마다 이야기가 살아 있구나
졸음에 겨운 예배당 종소리 사이로
섬 마을 처녀가 오순도순
마음을 전해오는 긴 골목 끝
앵두나무 샘 가로 찾아가서
첨벙이는 두레박소리 좀 들어보자
친구야
배를 타고 창선에 가자
처음 밟는 흙이 구름처럼 포근하고
남새밭 푸른 잎사귀가 한참 싱그럽구나
중천에 뜬 해도 낮잠을 자다가는
남해 섬 끝 오두막을 찾아가서
갯가에 황혼 불러들이고
갓 잡아 올린 고기로 매운탕 끓여
주거니 받거니 석양 속에 어울려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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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에도 언니가 있다 / 조정애
아버지가 그리워
그리움의 시를 새긴 도자기 컵을
예배당에 가져갔다
오후 기도찬양모임에서
커피를 마시는 동안
네 살배기는 아버지 이야기를 했다
옆 자리 나이든 황 권사가
17개월에 아버지를 여의었다고 했다
맞은 편 기도를 이끄는 김 권사는
태어나자마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둘둘 말아 밀쳐둔 아기가
눈망울을 초롱초롱 뜨고 있었다고 한다
그때 나의 슬픔은 사라지고
네 살배기가 옆에 앉은 야윈 한 살배기를 안아주었다
화장실 앞에서 갓난아기를 만나
꼬옥 안아주며 등을 토닥였다
어느새 나는 언니가 되어 있었다.
(* 조 시인은 네 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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