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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 배창환,
그는 착하고, 참 따뜻한 시인입니다.
조용히 봄비가 내리는 이 아침에
그의 시집 ≪별들의 고향을 다녀오다≫에 실린
시 몇 편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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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씨처럼 / 배창환
날 때부터 누구나 홀로 와선
제 그림자 거두어 저물어 가는 것
빛나던 날의 향기도, 쓰라린 고통의 순간들도
오직 한 알 씨앗으로 여물어 남는 것
바람 크게 맞고
비에 더 얼크러지고
햇볕에 더 깊이 익어
너는 지금 내 손바닥에 고여 있고
나는 또 누군가의 손바닥 안에서
생의 젖은 날개 파닥파닥 말리며
꼭꼭 여물어, 까맣게 남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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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하지 않기 위하여 / 배창환
가난하지 않기 위하여
큰 꽃은 큰 꽃을 달고
작은 꽃은 늦가을에 죽을 힘 다하여
작은 꽃이라도 피워 올린다
가난하지 않기 위하여
큰 사람은 큰 사람으로 살고
작은 사람은 젖 먹던 힘 다하여
아이도 낳고 돈도 벌면서
처마에 작은 연등 하나라도 애써 밝힌다
어떤 이는 돈을 남기고
어떤 이는 남부럽지 않을 자식을 남기지만
또 어떤 이는 가슴에 그늘 깊은 나무를 심고
따뜻한 시를 남기고, 뒷사람이 찾아 밟을
눈길 위에 곧은 발자국을 남긴다
해 뜨면 곧 녹아 사라져 없어질지라도
가난하지 않기 위하여
가난한 이들은 어둔 밤 귀갓길 골목 어귀에
낯익은 별무리 찾아 띄워 길을 밝히고
키 낮은 담장 아래 볕살 닿는 자리마다
시간의 긴 터널 건너온 여문 꽃씨를 뿌려 거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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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의 우물 / 배창환
북간도 땅 명동촌 푸른 옥수수 밭 한가운데 어린 동주가 책가방 둘러메고 다니던 명동소학교가 있고, 몇 굽이 출렁이는 황톳길 걷다 보면, 사방이 확 트인 언덕 능선 아래 그가 마지막으로 돌아와 누운 햇살 고운 무덤이 있고,(그 곁에 몇 발 떨어져 송몽규 열사가 나란히 누워 있고) 언덕을 내려와 마을 안쪽에 들어 동주 집 바깥마당쯤에 이르면, 그의 기념관이 된 낡은 벽돌집 교회 지붕 위 파아란 하늘 아래, 선량하고 섬세한 문청(文靑) 동주에게 언젠가 거기 올라갈 수밖에 없을 거라는 무서운 예감을 속삭여 주던 하얀 십자가가, 아직도 높이 걸려 빛을 뿜고 있었다
모퉁이 살짝 돌면 그의 고향집 팻말이 가리키는 곳에 단아한 기와집 한 채 서 있고, 발 벗고 툇마루 올라가면 안방에 모셔 둔 낯익은 영정이 앞마당 너머 옥수수 밭 파아란 하늘을 마시고 싶어 눈을 크게 뜨고 있고, 햇살 넘쳐나는 벌판으로 이어진 집 뒤안에선 몇 그루 검은 버들이 한여름 뜨거운 매미 몇 마리를 불러들이고 있었다
그 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 우툴두툴한 자갈 몇 개 박혀 있는 마당가에 그가 늘 오가며 얼굴 비춰 보던 둥근 우물이 하나, 낡은 사각뿔 덮개 아래 고요히 누워, 깊고 맑은 하늘 같은 그의 눈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오래전부터 동주 집에 가면 컴컴한 그 우물 안 하늘을 (거기 비친 내 얼굴을) 들여다보고 싶었지만, 우물이 나를 보고 옛 주인 아니어서 받아 주지 않을까 봐 차마 덮개를 열지 못하고 돌아서고 말았는데, 그날 이후 내 가슴에는 사시사철 동주의 우물이 차고 들어와 가을바람처럼 서늘하게 출렁이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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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한 편의 시처럼 / 배창환
외로울 때는 시를 읽어라
비가 뜨겁게 젖어 올 때도 읽고
함박눈이 곤한 잠 흔들어 깨울 때도
시를 읽고 읽어라
인생이 한 편의 시가 되게 하라
삶은 어차피 내가 산 만큼의 삶,
감동이 없는 삶은
죽은 것이다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다, 아이야
엉뚱한 길 헤매느라 탕진하지 말고
남의 인생을 대신 살지 말고
치열하게, 치열하게 네 길을 가라
그 길 멈추어 서는 어느 먼 날에
자신을 향하여, 세상을 향하여
- 이게 바로 나야!
단 한 줄의 시, 쓸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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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매 해장국집 / 배창환
내 고향 성주, 성주초등학교 동편 담장 돌아 몇 발짝 가면
파리똥이 가득한 유리 미닫이
일 년에 딱 두 번, 설 추석 말고는 늘 열려있어
간판 없어도 찾는 사람은 잘 찾는
쩡쩡한 팔십 노인, 할매해장국집 있었는데
잘 삶은 무청에 들깨 갈아 넣어 만든
구수한 국물에 계란 노른자만 톡, 깨 넣은 해장국,
그 위에 잘게 다져 넣은 풋고추와 마늘 양념
그 위에 설설 흩쳐놓은 고춧가루가 전부인 그 해장국은
묵직한 놋그릇에 막걸리 한 대접 받아놓고
혼자 먹어야 제 맛인, 진짜 진국이었는데
때마침 성주장날, 삼십 리 가야산 친정 마실에서
첫차 타고 왔다면서 보따리부터 풀어헤치는
옛 동무라던가, 호호백발 곱게 빗어 넘긴 꼬부랑 할매
호박잎 세 모숨을 천 원에 사 주면서
주인 생색으로 목에 힘주는 것까지도 괜찮았고
막걸리 한 사발 덤으로 얹어주는
구수한 인정도 걸걸한 입담도 더없이는 좋았는데
겨울 가고 햇살 술술 풀리던 날, 할매 삭신 덩달아 풀려
일손 놓고 가야산 양지밭에 오래 쉬러 가신 뒤로
중늙은이 새 주인이 간판을 떠억- 해 달고
투명 유리문에 ‘원조할매해장국’이라 아무따나 휘갈겨 놓곤
예전의 그 시래기 해장국 끓여내고 있는데
국 맛도 할매 따라 전설 속으로 가 버린 그 집,
지금도 꼭두새벽 일하러 나섰다 공친 사람들
해장술에 속 달래러 꾸역꾸역 문지방 넘어 들어오면
할매 미닫이 드르륵 열고 시래기국 뜨러 나와
무거운 무쇠 솥뚜껑 옆으로 비시시 끌이비씨
새하얀 김에 금빛 주름 화안히 펴실 것만 같은데
(*끄리시씨- 경상도 사투리. 끌어당겨 열어 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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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유모차의 기억 / 배창환
유모차 한 대, 물가 방둑에 섰다
나는 오래 된 저 유모차의 내력을 알 듯도 하다
10대 후반에 이곳 산골로 시집 와서
시어머니 등쌀에 밥도 오며가며 주먹으로 집어먹으며
자정이 왜 생겼냐고 호롱불이 닳도록 일하고
허리 한번 펼 새 없이 하루가 가고
이틀 사흘 열흘이 가고, 해가 바뀌면서
배 속 아이 땀띠 나도록 일하고, 아이 낳아선
뒷골 밭둑 나무 그늘 아래 소쿠리에 풀어 두고 키웠는데
호랑이 시어머니 산으로 가고
그 아이가 커서 아이 낳자 허리가 굽었다
시어머니 무서워 자식 한번 안아 얼러보지 못한 죄밑 아려
금지옥엽 손주는 유모차에 태워 들로 강가로
둥글고 환한 호박꽃에 아이 얼굴 비춰주고
비 오는 날 앞또랑에 올라오는 물고기의 길을 일러주고
빨간 고추잠자리 잡아 노을에 시집 보내주기도 하며
금방 뽑은 무 이파리 아이 곁에 너풀너풀 싣고
덜컹거리는 자갈길 춤추며 돌아오던 그 유모차
아이가 유모차에서 뛰어내려 세발자전거 탈 무렵
이 악물고 버티어 온 그녀의 관절이 무너졌다
더 이상 아무것도 실을 수 없는 유모차,
움직이는 바퀴가 기둥 되어, 텅 빈 힘으로 땅을 굴러
비틀거리는 할머니를 당당히 이끌고 다니던 그 유모차
하얀 조팝꽃 지고, 온 방둑이 하얀 개망초꽃 지천이던
6월 어느 날, 그 집 앞 감나무 그늘에
보일 듯 보일 듯 호박꽃 같은 조등弔燈이 걸리고
며칠 내내 하늘이 터져 큰물 지는 동안
그녀의 유모차는 혼자 냇가 방둑에 비바람 맞고 서서
시퍼렇게 불어가는 냇물을 보고 있었다
착한 물고기들이 등에 불 하나씩 켜 들고
하늘 길로 줄지어 올라가는 걸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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