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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우리는 용정의 명동촌으로 향했습니다.
민족시인 윤동주를 만나러 가는 길입니다.
용정으로 가는 길은 시멘트포장만 되었다뿐이지 우리네 60년대의 신작로와 똑같았습니다.
백양나무와 키 작은 족제비싸리가 많이 심어져 있었습니다.
연변의 가로수는 백양나무와 처진느릅나무가 주종이었고 가끔 능수버들도 볼 수 있었습니다.
먼저 윤동주 시인의 옛집 바로 앞에 있는 명동교회에 들렀습니다.
명동교회는 윤동주의 외삼촌이신 김약연 목사가 세웠고 동주의 어머니는 바로 김 목사의 누이동생이었습니다.
동주의 할아버지는 이 교회의 장로이셨고 아버지는 명동학교의 교사였습니다.
그러니 이 명동교회는 어린 동주가 삶의 가치관을 정립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현재 명동교회는 명동역사전시관으로 쓰이고 있으며, 윤동주의 시집 등을 팔고 있었습니다.
교회 입구에는 높다랗게 나무 십자가가 세워져 있어 윤동주의 시 '십자가'가 생각나게 했습니다.
시인의 집은 넓은 벌판 가운데에 아늑히 자리잡고 있었는데
뒤에는 백양나무가 가득 서 있고, 앞에는 미루나무가 세 그루 서 있어 운치가 아주 그만이었습니다.
집 뒤에는 1박2일팀이 씨름을 했던 씨름터가 있었습니다.
윤동주가 다녔다는 명동학교 옛터에도 들러
옥수수밭 가운데 새로 세우고 있는 명동학교를 구경하고 기념사진을 여러 장 찍었습니다.
오다가 1919년 3월 13일에 용정에서 만세운동을 하다가 희생당한 분들을 모셔놓은
3·13반일의사릉에 잠시 들렀다가 윤동주 시인의 무덤으로 향했습니다.
이미 한번 와 본 적이 있는 김명희 선생님의 제안에 따라 우리 일행은 버스에서 내려 걷기 시작했습니다.
시인의 무덤을 찾아가는 길은 정말이지 무척이나 낭만적이었습니다.
야트막한 야산에 아득히 펼쳐져 있는 옥수수밭과 콩밭 한쪽에
노란 딱지꽃이 흐드러지게 핀 공동묘지가 있고 그 가운데 시인의 무덤이 있었습니다.
바로 옆에는 명동촌의 시골집에서 동주보다 불과 석 달 먼저 태어나 함께 자라고
같이 일본까지 갔다가 후쿠오카형무소에서 동주보다 조금 뒤에 죽은 고종사촌형 송몽규의 무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간소하게 준비해 간 제물을 차리고 시인의 무덤에 모두 함께 절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시인의 시집에 있는 시를 돌아가면서 조금씩 읽었습니다.
시대는 달랐지만 시인의 마음 가까이 다가가는 듯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오후엔 다시 윤동주 시인이 다녔다는 은진학교의 흔적이 남아있는 대성중학교에 들렀습니다.
역사전시관에서는 여교사가 직접 녹음기처럼 해설을 해주고 있었고 윤동주의 교실을 별도로 복원해 두었더군요.
장학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거라며 교내 곳곳에서 관광기념품을 팔고 있어서 마음이 몹시 무거웠습니다.
그리고는 용정시내에 있는 송원도서관에 들렀습니다.
김재권 회장 개인이 우리 민족의 얼을 지키려고 자부심을 가지고 운영하고 있었는데
도서관이란 이름을 붙이기도 어려운 아주 작은 건물이었고 아이들이 읽을 만한 책도 별로 없어 보였습니다.
우리가 각자 2~3권씩 미리 한국에서 들고 간 책과 전국국어교사모임에서 기부한 책을 두 박스 정도 드렸더니
아주 길게 치사를 하셔서 애를 먹었습니다.
용정지명기원지 우물인 용두레 우물에도 잠시 들렀습니다.
수양버들이 늘어진 공원은 우리네와 마찬가지로 노인들의 휴식처였습니다.
문명의 발달로 점점 더 오래 산다는데 나무토막 같은 노인의 삶이 무료하지 않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다시 용정의 고등학교인 용정고급중학교에 들러
방송산 선생님에게 우리 조선족들의 삶과 용정의 학교 실정에 대해 들었습니다.
용정의 고급중학교는 우리의 서울대학교에 해당하는 북경대학에도 한 해에 몇 명씩 진학시키는 일류학교로서
선생님은 한족학교 아이들보다도 우리 조선족 아이들이 훨씬 진학률이 좋다고 자랑하셨습니다.
무용을 비롯한 예능대회에서도 중국 전체에서 늘 우수한 실력을 발휘하고 있다고 합니다.
중국은 자기네와 달리 소수민족은 자식을 여러 명 낳도록 허락하고
소수민족 스스로 자치법을 만들어 그들의 전통과 문화를 이어가도록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방 선생님은 도시로 나간 우수한 우리 조선족 학생들이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는 현실을 보면서
100년쯤 더 지나면 우리 조선족도 결국 중국에 동화되고 말지 않을까 하고 걱정하셨습니다.
우리 가곡 ‘선구자’에 등장하는 용문교를 지나다가 차를 세우고 잠시 그 아래로 흐르는 혜란강을 바라보았습니다.
역사 속의 그 옛날을 회상하려 애써 보았지만 시냇물 같은 해란강은 말 없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이번엔 다시 차를 타고 비암산으로 향했습니다.
대부분의 관광객들이 먼발치로 바라만 보고 스쳐지나가는 일송정에 오르기 위해서였습니다.
일송정은 정자 모양을 한 잘 생긴 소나무로서 그 옛날 독립투사들이 그 나무 아래 자주 모였는데
일본사람들이 강제로 그 소나무를 죽게 하였다고 전해진답니다.
1991년에 뜻 있는 사람들이 잘 생긴 소나무 한 그루를 심고 그 옆에 지금의 정자를 세웠다고 합니다.
일송정에서는 용정시와 유유히 흐르는 해란강,
그리고 조선족이 처음으로 벼농사를 지었다는 들판을 시원스레 내려다 볼 수 있어 조망이 아주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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