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상 이야기

보배라는 아이

by 정가네요 2008. 9. 7.

 

* 오늘은 조금 무겁고 긴 얘기를 하나 하렵니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지만
요즘 아이들은 정말이지 선생님을 하나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어디서 만나든지 "선생님" 하고 부르는 녀석은 없고
대부분 "샘. 쌤' 하고 부른다.

 

지나가는 교사의 옆구리를 쿡 찌르지 않나, 
어떨 땐 등을 툭툭 치는 사람이 있어 돌아보면 학생이다.
순박해서 그러려니, 친근감의 표시려니 하지만 참 기분이 묘할 때가 많다.

 

엊그제, 1학년 수업시간이었다.
교실 맨뒤 한가운데에서 두 녀석이 수업시작 때부터 줄곧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책을 펴 들고 내용설명을 하며 다른 애들 모르게 가까이 가서 슬쩍 눈치를 주고 왔지만
전혀 태도의 변화가 없다.

얘기를 그만 둘 모습이 아니었다.
다시 가서는 아주 가볍게 꿀밤을 한 대씩 주었다.

 

그랬더니 대뜸 한 녀석이

"손에 분필 묻은 거나 털고 때리세요." 했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녀석아, 그건 때리는 내 마음이야." 했더니
"맞는 사람 기분 나빠요."

 

"그렇게 수업시간에 얘기하는 녀석들을 그냥 가만 두란 말이냐?"
"난 얘기 안 했는데요."

 

"그럼 지금까지 둘이 얘기한 건 뭔데?"
"난 말 안 했어요."

 

"너는 말 안 했어도 네가 들어줬으니 옆의 사람이 계속 얘기했을 거 아니냐?"
"듣기도 하고 안 듣기도 하고 그랬어요."

 

"그래, 선생님이 살짝 때린 그게 정말 그렇게 아팠니?"
"예, 아팠어요."

 

눈을 똑바로 뜨고 한 마디도 지지 않고 계속 말대꾸를 한다.
그만 화가 나서 정말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이라고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한 동안 꾸지람을 하고 나서 수업을 하니 수업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오늘 다시 그 교실에 수업을 하러 갔는데
녀석은 제일 앞자리에 앉아 나를 보고도 미안한 기색 하나 없이
아무 일 없었던 듯 아주 당당하게 앉아 있었다.
책을 건성으로 펴 놓고 손에 가위를 들고 종이를 오려 뭔가를 만들고 있었다.
마음 속으로 '저 녀석이 정말' 했지만 꾹 참았다.

 

수업을 마치고서 녀석을 데리고 교무실 옆에 있는 빈 교실로 갔다.

난 아이를 꾸지람할 때 절대로 꿇어 앉히지 않는다.
학생을 꿇어 앉혀 놓고 교사가 학생을 내려다 보며 얘기를 하면
마음 속의 반감 때문에 훈육의 효과가 전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녀석에게 맞은편 소파에 앉으라 하고서

숨을 한번 들여 마시고 천천히 얘기를 시작했다.
녀석은 여전히 눈을 똑바로 흔들림 없이 크게 뜨고 나를 쳐다본다.

 

"보배야, 너 선생님이 그렇게 밉니?"
다행히 녀석이 고개를 옆으로 저었다.
마음 속으로 나는 '됐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선생님을 그렇게 똑바로 쳐다보며 말대꾸를 하니?"
"원래 그래요."

 

"이 전에도 이런 비슷한 일로 선생님들한테 꾸지람 들은 적이 있지?
"예, 작년에도 그래서 선생님한테 맞은 적이 있어요."

 

"친구들도 모두 너는 원래 그런 아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예."

 

"그래? 그렇구나. 어제 오늘 너를 보고 선생님이 가만히 생각해보니
보배 너는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세상에 대해 불만이 무척 많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세상 모든 사람이 밉고......
네 마음 속에 뭔지는 모르겠지만 커다란 게 응어리져
꽉 들어차 있다는 생각이 들었단 말이야.

도대체 그 게 뭘까?"

 

순간 녀석이 고개를 푹 숙이더니 거짓말처럼 눈에서 금방 눈물이 뚝뚝 흐른다.
정말 뜻밖이었다.

 

"임마, 난 아직 말도 제대로 안 했는데 뭣 때문에 우는 거야?"

녀석은 이제 콧물까지 흘리며 서럽게 운다.
난 깜짝 놀라 당황하기까지했다.

 

"엄마가 이혼을 하셨어요."
"그래, 그랬구나......"

 

4살 때 엄마가 아버지와 이혼을 하셨는데
다른 남자와 다시 결혼을 했단다.
그리고 남동생을 낳았고.

 

그런데 농사일을 하시는 새아버지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저하고 말 한 마디 없이 지낸다고 했다.
용돈도 주지 않고 엄마가 겨우 차비만 주신다고 했다.
이젠 엄마까지 거의 저를 상대해 주지 않아
아버지 엄마뿐만 아니라 동생까지 모두 밉다는 것이다.
 
'아, 역시 그랬구나.'

주머니 속의 손수건을 꺼내 주고 눈물을 닦으라고 했더니 콧물은 닦지 못한다.
"눈물 닦고 나중에 빨아서 선생님 갖다 주면 되잖아."
그제서야 눈물과 콧물을 닦고 조분조분 얘기를 한다.

 

'아, 이 녀석 그 동안 정말 무척 외로웠구나'
나한테 이렇게 쉽게 마음을 열어준 게 정말 천만다행이었다.

 

"그랬구나. 보배야, 너는 잘은 모르겠지만
엄마도 너를 데리고 새아버지와 결혼했으니 어려운 게 많이 있었겠지?"
이제 내 말에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그런데, 그래도 세상에서 너와 제일 가까운 사람이 엄마겠지?
딸은 커서 엄마와 친구도 할 수 있다고 하는데 우선 네가 엄마와 가까워지려는 노력을 해 봐.
그렇게 빨리 가까워지지는 않겠지? 네가 노력하는데도 엄마가 널 귀여워하지 않는다고
금방 실망하지 말고 오랜 시간 끈기를 가지고 꾸준히 애써 봐."
 
"동생도 네가 멀리하면 너처럼 외롭겠지?
어쨌든 하나뿐인 네 동생이잖아. 조금씩 조금씩 네가 정을 줘 봐.
어렵겠지만 아버지에게도 뵐 때마다 살갑게 인사 잘 하고 말이야."

 

"선생님이 보기에 넌 정말 똑똑한 아이로 보이니까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
공부는 어떤데? 잘 해?"
"잘 못해요. 암기 과목을 잘 못해요."

 

"영어, 수학은?"
"영어 수학은 좀 해요. 90점 나와요."

 

"아이구, 잘 하는구나.

암기과목은 조금만 노력하면 누구나 잘할 수 있는 거니까
우선 공부부터 좀더 열심히 해서 엄마 아빠 기분이 좋아지시도록 해 봐."

녀석은 이제 계속 끄덕끄덕한다.

 

"그래, 오늘 하루만에 다 얘기할 수는 없으니까 다음에 또 얘기하자.
선생님은 보배가 이렇게 솔직하게 얘기해 주어서 정말 고맙다.
힘들 땐 언제든지 선생님한테 와서 얘기하고 싶다고 해.
마음에 무거운 짐을 안고 혼자 꿍꿍 앓는 것보다는
누군가에게 얘기하고 나면 훨씬 가벼워질 테니까 말이야."

 

"네 얘기를 들어줄 친구는 있니?"
"예,"

 

"그래, 다행이구나.

그 친구와 얘기해도 시원하지 않을 땐 언제든지 날 찾아 와.
내가 다 들어줄 테니까."
"예."

 

녀석의 어깨를 가볍게 감싸주며 교실로 들여보냈다.
녀석은 90도로 인사를 하고는 돌아갔다.
태도를 보니 본디부터 나쁜 녀석은 절대로 아니었다.

 

조금만 따뜻하게 대해 주면
정말 이름처럼 보배같이 귀한 아이가 될 수 있을 텐데
제대로 감싸주지 못하고 포근하게 안아주지 못해
이 어린 아이에게 커다란 멍에를 지운 어른들이, 이 사회가 미웠다.

 

아이들이 빗나가는 건 거의 대부분 어른들에게 책임이 있다.

 

중학교 1학년 아이로서는 정말 힘들고 어려운 일이겠지만
녀석이 용기를 내서 잘 해 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