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원도 안흥의 보리소골에서 나무와 꽃, 그리고 산나물을 가꾸며 글을 쓰고 있는
최성수 시인의 제5시집 「물골, 그 집」을 읽었습니다.
1987년 '민중시'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한 시인은
교사생활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게 따스한 눈길을 주면서도
지나온 시대의 암담한 순간들도 외면하지 않고 되돌아보고 있네요.
시 몇 편을 소개합니다.
* 문득, 봄 / 최성수
천천히, 느릿느릿
쥐 잡는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여든쯤 된 할머니
아침 자시고 나온 마실길
햇살보다 느적느적 떼놓는
걸음처럼
잎 돋는다
조팝나무 걸어온다
* 물골, 그 집 / 최성수
종일 아무도 오지 않을 것 같은
물골 그 집에 앵두꽃 피었다
문은 잠겨 있고
저 혼자 봄바람에 팔랑거리는 현수막
‘감자전 한 접시 (3장) 1만원’
소주 한 병은 공짜란다
주인은 없고 큰 개 한 마리
멀뚱멀뚱 낯선 이 바라보는
그 시선도 이승의 것 같지 않은 봄날 하루
먼 데서 밭 가는 트랙터 소리만
잠든 햇살을 깨우는데
뒷산 솔바람 갓 핀 진달래 꽃잎만
간질이는데
주인장 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혼자 핀 앵두나무 그늘에 앉아
꽃내음 안주 삼아 낮술을 기울이면
천천히 흐르는 시간, 느릿느릿 지나는 바람
사는 일은 더없이 막막하지만
때로 이렇게 흔들흔들 건너가는 것도
그저 헛된 일만은 아니라고 속삭이는
이 세상 풍경 같지 않은
물골 그 집에 앵두꽃 혼자 핀
이 봄날
* 여름 / 최성수
딱새 새끼가 알을 깨고 나올 때
백도라지꽃 입 벌리고 햇살 쬘 때
미처 못 뽑은 배추 꽃대 키울 때
골짜기 저 혼자 깊어질 때
* 가을 하루 / 최성수
하얗게 서리 내린
아침
마당가 마른 꽃잔디 위에
다람쥐 한 마리 앉아 있었다
그 눈빛이 처연했다
한낮엔
지는 잎보다 가벼운 가을 햇살 위를
어린 살모사 한 마리 느리게 지나갔다
징검돌 하나만 한 길을
두어 각 동안 온몸으로 걷던
그의 몸짓이 아련했다
저녁이 되기 전에
서둘러 찾아온 어둠이 길게 눕는
산마을
아무 일도 없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아
마음이 텅 빈 채 가득했다
짧고 긴
가을날
* 예순 / 최성수
곰취 네 포기 산비탈에 옮겨 심고,
배추벌레 서너 마리 잡아주고,
늦도록 웃자라는 하우스 안 잡초 몇 포기 뽑아주고,
하루 사이 발갛게 익은 고추 여남은 따 말리고,
빗줄기 오락가락하는 하늘만 바라보다,
어느새 어둑어둑해지는,
가을 하루 같은,
나이
* 낙엽송 / 최성수
나이 든다는 것은
제 빛깔을 하나하나 지워가는 일
비 내리는 가을 숲가에서
겨울 채비로 제 잎을 떨구는 낙엽송을 보면
지나간 시간 모두 아름답다
절정에서 스러지기 위해 낙엽송은
그토록 빛나는 얼굴을 했던 것일까
아랫도리부터 차근차근 지워가는
낙엽송의 노오란 빛
지우고 지워 마침내는
검은 선 하나로 남는
제 빛을 다 지우고서야
비로소 완성되는
낙엽송
생은 저렇게 결국
무채색으로 남은 풍경 같은 것
비는 내리고
나는 겨울 숲처럼 천천히 지워지고 있었다
* 성북동 산 3번지 그 집 / 최성수
그리운 것은 모두 두고 온 그 마을에 있으니,
성북동 산 3번지 비탈길을 오르면 나는
세월을 거슬러 소년이 된다
서울에 올라와 처음 집을 갖게 된 아버지는
마당 귀퉁이에 작은 화단을 꾸몄다
농부인 아버지의 기억이 담겼던 그 집
삼백만 원에 샀던 무허가 블로크 집에서는
한겨울이면 대접의 물이 꽁꽁 얼었다
세월처럼 바래고 낡아 마침내는 제 몸조차 가누지 못했던
그 집
세 살짜리 계단을 걸어올라 한참 숨이 차야 만날 수 있던 녹슨 철대문과
비가 오는 날이면 청량리역에서 기차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던 다락방
한양도성을 마주보며 양지바른 언덕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그 마을에서
나는 소년이 되고, 청년이 되고, 마침내는 아버지가 되었다
성북동 산 3번지
철거반과 맞서 똥물을 퍼부으며 싸웠던 사람들이 눌러 살던 곳
제 몸을 부숴버린 블로크 대신
새로 벽돌집을 지은 아버지는 담장 아래 장미를 심었다
오월이면 담장을 넘어 늘어지던 장미는
재개발의 광풍을 먹먹하게 바라보고 있을까?
아버지와 함께 심은 향나무도
늙어 숨을 거둔 그 집
집집마다 대추나무 한 그루씩 심어 가을을 맞았던 그 동네
이제 젊은이들은 마을을 떠나 세상으로 나가버리고
나이 든 어른들만 옛 집처럼 늙어가는 곳
3번지를 날던 비둘기가 사라지고 남은 하늘은
오늘도 여전히 청청 눈부시다
그리운 것들은, 다 두고 온 그 마을에 있으니
성북동 산 3번지 비탈길을 오르면 나는
시간을 거슬러 소년이 된다
'좋은 책 소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읽는 직업』 (0) | 2020.12.07 |
---|---|
아름다움은 지키는 것이다 (0) | 2020.11.24 |
김대호 시집 ≪우리에겐 아직 설명이 필요하지≫ (0) | 2020.06.12 |
≪바람이 수를 놓는 마당에 시를 걸었다≫ (0) | 2020.06.03 |
≪별들의 고향을 다녀오다≫ / 배창환 (0) | 2020.04.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