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 소식(蘇軾)의 적벽부(赤壁賦) 가운데, 蘇者曰 [客亦知夫水與月乎. 逝者如斯, 而未嘗往也. 盈虛者如彼, 而卒莫消長也, 蓋將自其變者而觀之, 則天地曾不, 能以一瞬. 自其不變者而觀之. 則物與我皆無盡也. 而又何羡乎, 且夫天地之間, 物各有主, 苟非吾之所有, 雖一毫而莫取. 惟江上之淸風, 與山間之明月, 而得之而爲聲, 目遇之而成色. 取之無禁, 用之不竭, 是造物者之無盡藏也. 而吾與者之所共樂
소자왈 객역지부수여월호, 서자여사, 이미상왕야, 영허자여피, 이졸막소장야, 개장자기변자이관지, 칙천지증불, 능이일순, 자기불변자이관지, 즉물여아개무진야, 이우하이호, 차부천지지간, 물각유주, 구비오지소유, 수일호이막취, 유강상지청풍, 여산간지명월, 이득지이위성, 목우지이성색, 취지무금, 용지불갈, 시조물자지무진장야, 이오여자지공락
소자는 말했다. "손님은 저 물과 달을 아는가? 흘러가는 것은 이와 같으되 일찍이 다 가버리지 않았으며, 차고 기우는 것이 저와 같으되 사라지고 커지는 일이 없으니, 변하는 데서 보면 천지(天地)가 한 순간도 가만히 있지 않으며, 변하지 않는 데서 보면 사물과 내가 모두 다함이 없으니 무엇을 부러워 하겠는가. 또한 천지 간의 사물에는 물건마다 제각기 주인이 있으니 진실로 내 것이 아니면 터럭만치도 취해서는 안될 것이다. 오직 강가의 맑은 바람과 산간(山間)의 밝은 달은 귀로 들으면 소리가 되고 눈으로 보면 색이 되어 가져도 금할 이 없고 써도 다하지 않으니, 조물주의 무궁무진한 곳집이요 나와 그대가 함께 즐거워할 것이로다." 왕안석의 신법이 득세할 때 소식이 이에 반대하다 황주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도중, 1082년 7월 그가 47세 때 당시 전(前)적벽부를 짓고, 두 달 후에 다시 손님과 적벽강에서 노닐며 지은 시가 바로 이 시 후(後)적벽부이다. 그가 50세 되던 해에 철종이 즉위하여 다시 구법당이 득세하자 예부상서 등의 관직에 역임하지만, 황태후가 죽으면서 신법당이 득세하자 하이난섬으로 유배되어 7년 간 귀양살이를 한다. 휘종이 즉위하여 해배되어 돌아오던 도중 소동파는 사망한다. 위의 시는 후(後)적벽부의 일부로, 동파와 노닐던 손님이 당대를 풍미한 영웅 조조 역시 죽고 사라졌다고 하면서 인생의 무상함을 논하자 이에 답한 부분이다. 동파는 천지는 변하는 데서 보면 변하지 않은 게 없고, 변하지 않는 데서 보면 변한 게 없다고 말하면서, 관점에 따라 모든 것을 달리 바라볼 수 있다고 발한다. 그리고 삶과 죽음 역시 매한가지이며, 죽음이나 삶의 유한함에 대해 슬퍼하지 말고 심미적 쾌락을 추구하라고 말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이 시의 주제는 인생의 무상함에 대한 경계, 자연예찬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시는 왕안석의 신법이 천하에 득세하여 동파가 유배 생활을 하던 시기에 쓰인 것이다. 동파의 처지는 신법의 반대자로서 유배 당한 정치인이며, 작품의 배경 역시 유배지이다. 그런데 적벽부 어디를 살펴봐도 실의에 빠진 정치인의 면모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동파는 매우 기쁜 마음으로 살고 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면, 당시 상황에 대한 동파의 주장이나 해석이 들어가 있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인생은 유한하고, 그래서 슬프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첫 번째 방안은, 정치적 영광과 명예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입장은 조조의 사례에서 기각되었다. 두 번째 방안은, 신선이 되는 것이다. 인생이 유한하다면, 최대한 건강하게 오래 살아라. 이것은 손님의 주장이다. 마지막으로, 동파가 제사한 방안은 이렇다. 자연의 만물은 변화의 관점에서 보면 이렇고, 불변의 관점에서 보면 저렇다. 관점에 따라 영원하다고 간주하면 영원한 것이고, 덧없다고 보면 덧없는 것이다. 즉, 관점의 변화가 관건이다. 그런데 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하다. 동파가 추구하는 경지는 영원이든 무상함이든 자유자재로 취할 수 있는 관점의 변화를 달성하기 위해, 그러한 관점을 갖춘 특정한 주체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이, 내 것이 아니면 취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주인이 있는 세계가 따로 있고, 주인이 없는 세계가 따로 있다. 그런데 이러한 구분 역시 관점에 따라 바뀔 수 있다. 후자의 세계, 곧 자연의 세계는 제로섬의 세계가 아니며, 우리는 이로부터 취할 수 있는 것을 취하고 심미적 쾌락을 얻어야 한다. 이러한 해석은 왕안석의 신법에 대한 비판을 어느 정도 담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왕안석은 전자의 세계, 즉 주인이 따로 있는 세계에 대해 국가가 개입하려고 하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펌> http://cafe.daum.net/ayogin/O0oP/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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