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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

[스크랩] 무감(無感)의 공간에 산다

by 정가네요 2015. 6. 11.

내 속에서 나온 아이는 늘 어리게만 보입니다.

생각도 몸도 마음도 다 어린 아이처럼만 보입니다.

그러다 가끔 아이가 쓴 글을 보면서 참 많이 컸구나,

이렇게 느끼며 살고 있구나...라고 생각합니다.

어제 책한권 만든거라고 하면서 제게 던져 놓고 간게 있었습니다.

학교 교지 편집장으로 있으면서

'세월호 , 일년 '이라는 주제의 기획물 중 한꼭지 녀석이 썼나봅니다.

 

글쎄요.. 글이 다소 기네요  ㅠㅠ (그리고 많이 어설프고요)

시간 나면 읽어보시라고요.

요즘 젊은 청년들의 생각도 들여다 볼겸 ^^ (단락은 제임의로 준겁니다. 읽기 편하라고요)

 

 

<무감(無感)의 공간에 산다>

 

칠 전, 여느 때처럼 지하철 환승을 위해 사람들 뭉텅이에 낀 채로 줄지어 걸음을 옮기던 중,

앞서 지나가던 분이 내뱉은 차갑고 메마른 외마디가 가슴에 박혔습니다.

 

어우 씨깜짝이야

 

사실 하루에도 몇 번씩은 할 만한 일상적인 한 마디일 터인데,

저도 따라서 모퉁이를 돌아 에스컬레이터를 마주하자니 혼란스럽고 맥이 풀리는 듯합니다.

언제부터 그곳에 넘어져 계셨을까,

거동이 불편한 분이 에스컬레이터 끝자락에 넘어져 있었습니다.

움직이는 에스컬레이터 탓인지 그분은 애를 써도 일어나지 못하셨고,

옆으로 누운 채로 그 자리를 빙빙 돌고 있었습니다.

무엇이 그리도 바쁜지, 사람들은 힐끗 쳐다보고, 그저 놀란 후 그 앞을 무심하게 지나쳤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마치 외계인쯤으로 여기는 듯,

괜찮으세요? 도와드려도 될까요?”라는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습니다.

 건조한 시선이 흩뿌려진 분위기가 야속하고 씁쓸하고, 또 슬펐습니다.

 

혼란스러운 마음을 미뤄두고 조심스럽게 그분께 다가가

도와드리고는 다시 길을 나섰습니다.

 

그런데 문득, 몇 달 전의 비슷한 경험이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그때도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가고 있었습니다.

 

다리가 불편하셨는지 휘청 걸음을 옮기시던 분이, 내리다가 그만 쿵 넘어지셨습니다.

 승객들은 마치 구경거리라는 듯이 목을 쭉 빼 쓰러진 분을 보고는,

 이내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라는 듯 다시 스마트폰으로 시선을 돌렸습니다.

쓰러진 이의 고통과 당혹감에 무심하게 눈을 감았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이런 풍경을 만든 것인지 모르지만, 숨이 막힙니다.

 

론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무심했다고 말하는 것은 무리겠지요.

 또 사람은 피치 못하게 현실이라는 가혹한 짐에 메여있었기에

 아무리 타인의 당혹스러움, 아픔과 고통에 공감(共感)하지만

 직접 손을 내밀 수도 없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손 치더라도 왜인지 착잡함이 가시지 않습니다.

 아마 이 경험들은 단순히 개인의 부박함에서라기보다,

 오히려 어떤 배경에서 비롯한 필연적인 일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슬프게도, 건조하기 이를 데 없는 무관심과 무감(無感)’

이미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일상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생활고에 못 이겨 스스로 목숨을 끊은 세 모녀의 작은 지하방에도,

슬픔을 온몸으로 견뎌내야만 했던 비정규직이 소복을 입고 기어 다니는 거리에도,

부당해고를 호소하는 천막 안에서도,

그리고 시간만 무심하게 흘렀지 아무 것도 밝혀지지 않아

 여전히 삼백 넷의 영혼을 끌어안고 사는 유가족들의 고통 앞에서도 말입니다.

 

맹자는, 인간의 심성에 내재한 타인의 어려운 처지를 그냥 보아 넘길 수 없는 본래의 마음

 측은지심이라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따사로운 심성은 고사하고, 공감능력이 실종된

오늘 무감 사회를 보고 있자니, 복잡한 마음이 듭니다.

 

자의 말처럼 만약 공감이 인간의 천성적인 본능이라면,

그 자체는 사라질 수 없겠지요.

설령 무감 사회에서일지라도 각자의 공감 능력은 필시 어딘가에는 남아있을 것입니다.

 

다만 무언가에 의해 마치 그것이 사라진 것처럼 보일 터입니다.

그 무엇인가가 무엇인지는 수년 전부터 농담처럼 유행하기 시작해,

기존의 이즘들을 블랙홀처럼 집어삼킨 강력한 이즘,

 ‘먹고사니즘을 곱씹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태고부터 먹고사는 것은 언제나 인간 최대의 관심사였습니다.

원시시대 동굴벽화에는 다른 무엇보다 수렵과 채집,

사냥과 농경 등 먹고사는 것과 밀접한 것들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인간사에는 분명 그 이상의 것들이 있었다는 것도 분명합니다.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Manner maketh man)”는 영화 속 대사가 시사하듯,

 사람들이 자연을 벗어나 문명을 이루면 배려와 예의, 윤리와 규범 같은 것들을 따졌습니다.

 

 오로지 나만 먹고 살아가겠다는 벌거벗겨진 생존 욕구는

 수치스러운 것으로 여겨져 전면에서 사라지고,

욕구는 여러 고차원적 층위에 있는 것으로 덧입혀졌습니다.

그렇기에 생존 욕구는 지상의 가치로서 인식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배경이 무엇이든, 먹고사니즘이 하나의 시대정신이 되어버린 사회에서는

 이 모든 게 도로아미타불입니다.

 

오늘의 현실에서는 공동체 정신이나 인권, 공감 등

다른 사회적 담론들이 개재할 여백이 없습니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이란 장밋빛 표어가 더는 유효하지 않은 사회에서

그따위 것들은 먹고사는 데에 일절 소용이 없고 오히려 손해만 된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대신 각개전투와 승자독식이라는 야만적인 정신이 사회에 깃듭니다.

민생이나 경제 살리기를 내세우며 여러분의 지갑을 책임지겠습니다.”

 정치인의 흔한 수사도 가만히 뜯어보면 때때로 세련된 가면을 쓴 먹고사니즘에 불과합니다.

 

늘날 무감 사회의 기저에는 먹고사니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를 사회학자 김홍중의 말을 빌리면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후기 근대적 상황이 야기한 불확실한 미래와 가혹한 경쟁에 노출되었을 때,

가장 중요하고 모토로서 합당하게 선택되는 것은 생존(Survival)’ 그 자체이다.

각자도생의 전략을 세우고, 도태되지 않고 살아남기를 꿈꾸는 자들로

스스로의 마음가짐을 변화시킨다.

생존주의는 생존에의 불안과 강박 그리고 의지와 욕망의 형식으로 작용하면서

행위자들을 구체적으로 움직이는 마음의 구성체이다.

 

생존주의는 인간의 본능인 공감능력조차, 효율·속도·이윤 등

 먹고살기 위해 도움이 되는 쪽으로만 몰아가는 기제입니다.

달리 말해 이른바 무감 사회에서는 공감의 특정 영역으로의 독점

 나머지 영역에서의 공동화(空洞化)’가 이루어집니다.

 

이런 사회에서는 측은지심 등 보편적이었던 기존의 공감능력은 수거됩니다.

 대신 어떻게든 살아내 보이려는 자기소진적 분투나 생존을 위해 주창되는 성공신화 따위와

 동일시와 열망으로 나타납니다.

 

이렇게 공감이 비정상적으로 한 영역에만 몰리다 보면

정작 공감이 필요한 곳은 비워지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공감의 부재 상태 즉 무감(無感),

내가 아프지 않은 한, 내가 버려지지 않는 한은 아무렴 그만이라며

생존이 가장 큰 신조가 되어버린 정글 사회에서, ‘덤덤함냉소로 발현됩니다.

 

불행하게도.

앞서 말했듯이 개개인은 이미 충분히 공감을 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적어도 그렇다고느끼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다만 그 공감은 보편적인 정서가 아니라,

서바이벌 규칙에 의해서 승인되는 미덕들을 향해서만 나타날 뿐입니다.

생존경쟁에서 고군분투하는 개인은 끊임없이 자신을 비워내고,

그 자리에 갈구해야만 하는(실은 원하지 않는) 미덕들을 욱여넣습니다.

그리고 과잉 동일시로 인해 포화상태에 이른 개개인은 그것을 소화하기에만 몰두할 뿐,

측은지심은 그 필요성도 느낄 새가 없습니다.

처절한 경쟁에서 자신을 지켜내려면 한 조각 남아있는 본성마저 외면해야 합니다.

 심지어 존재의 결핍에서 오는 허무의 감정도 게워내야 합니다.

그렇게 쓰러진 이의 아픔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설움에,

이유도 모른 채 가족을 잃은 참담함과 분노에 덤덤해집니다.

 

생존주의의 비극은 자기방어로서 덤덤함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도태될지도 모른다는 생존주의의 불안과 강박은,

덤덤함을 넘어 더 적극적이고 자발적으로 정해진 쪽에 자신을 동화하고,

나아가 정해진 쪽을 자아의 내면에 도덕적으로 정당화하는 충분한 동력이 됩니다.

 

일단 생존에 성공한 이들은 생존경쟁의 정당성을 주장하면서,

기어코 무감이야말로 이성적, 객관적이고 보편적, 현실적인 것이라고 호언장담합니다.

나아가 그들은 그들이 잔류한 생존경쟁 시스템은 공정하고

패자들의 고통은 당연하다고 말합니다.

 

도리어 낙오자들을 향해 조소와 비난을 보냅니다.

그렇게 이들은 인간이 아니면서 인간인 척,

그렇다고 괴물도 못 되면서 괴물인 척 살아가면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확인합니다.

여기에서 결국 측은지심은 위선이,

연민은 성인군자 코스프레로 비난받지만,

무감은 온갖 미사여구로 합리화되어 미덕이 되고, 부끄러움의 자리는 의기양양함이 꿰찹니다.

 

빈곤을 비관하며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었던 모녀는 의지박약으로,

오체투지 행진은 불편을 초래하는 떼쟁이들의 몹쓸 짓으로,

정당한 파업을 하는 노동자들은 전문 시위꾼들로,

가족이 죽은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 하는 이들은

돈만 밝히는 세금도둑으로 자리매김합니다.

 

이해는 하지만 이젠 좀 지겹지 않느냐고, 언제까지 그럴 거냐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하니 그만 하라고 몰아세웁니다.

그렇게 무감이 날카로운 냉소가 됩니다. 더욱 잔인해집니다.

 

그렇습니다.

무감은 고여 있지 않고 이곳에서는 덤덤함,

저곳에서는 냉소로 번지며 그 영역을 확장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무감의 공간에서, 혹은 그 언저리에서 살고 있습니다.

숨 막히는 생존주의의 삶 속에서 주변의 슬픔과 고통에 감히 공감할 엄두도 못 냅니다.

스스로 겹겹이 가로지르는 문들을 만들어내 자신이 살아갈 일상의 영역을 좁히고 또 좁힙니다.

 

그 결과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을 남의 일정도로 치부해버리는

 타자화에 익숙해지면서 살아갑니다.

스마트폰이 바닥에 떨어지면 행여 액정이 깨졌을까 호들갑이지만,

정작 바닥에 고꾸라진 이를 향해서는 갑자기 졸음이 쏟아지는 듯

지그시 눈을 감아버립니다.

 

타인의 불행과 고통을 두고서, 그저 내가 아니라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으로 비극입니다.

그렇게나 자랑스럽게 떠벌리던 초연결 사회가,

고통과 아픔, 눈물과 슬픔의 감정들은 전혀 연결되지 않은 사회이니 말입니다.

 

 참으로 서글픕니다.

이상일지언정 생존 그 이상의 것들-자유, 평등, 박애 등-을 추구하며

사회적 삶을 일궈왔던 인간들이,

지금은 생존의 열망만을 지향해야 할 최종목표이자

 집합적 마음가짐으로 여기니 말입니다.

 

그렇게 본능적인 생존에의 경향성을 넘어 오로지 생()만을 향한 몸부림이 지배하는,

그래서 무감이 만연한 공간에 살게 되었습니다.

 

고통과 슬픔은 내 것이 아니어야 한다.”고 주문처럼 되뇌며 그저 살아내고 있습니다.

나만큼은 살아남길 염원합니다.

하지만 곱씹어보면, 이런 영겁의 타자화는 바로 지금을 살아낼 수 있는 임시변통이지,

궁극의 생존 비기일 리 만무합니다.

문화학자 엄기호 씨와 철학자 한병철 씨는 이런 냉혹한 진실을 명확하게 진단합니다.

 

생존자는 다음의 경연 앞에 있는 자에 불과하며,

기왕의 생존자에게도 미지의 생존게임은 어김없이 펼쳐질 것이다.

경쟁의 유사 무한성은 생존에의 성공을 일종의 소실점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리하여 꼭대기의 딱 한자리, 그 자리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다 패자가 된다.”

 

새로운 강제와 장치를 만들어 내는 후기 근대의 성과사회에서는

사회의 변방이나 예외 상태에 있는 사람들,

그러니까 배제된 사람들뿐만 아니라 (긍정성과 활동성의 과잉을 내면화한)

우리 모두가 예외 없이 호모 사케르인 셈이다.

모두가 저마다의 노동수용소를 달고 다니며지배 없는 착취가 가능해진다.

(이렇게 그들은) 극단적인 허무와 불안, 무력함 속에서

새로운 상황이 시작되도록 만들 방법인 슬픔과 분노마저 잊고

개별화되어 기계적인 자기소진에 빠져든다.

 

더 쉽게 말하면, 누가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오직 극소수만이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에서 생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살아남기 위한 무감은 역설적으로 언젠가는

자신을 향한 냉소로, 자기부정의 몸부림으로 돌아올 뿐이기에,

우리 대부분에게 정작 생존은 환상에 가깝습니다.

무감 사회의 진정한 비극은 여기 있는 듯합니다.

 

그저 어떻게든 오늘을 살아내려는 생존투쟁과 그것의 발로인 무감은,

사실 약자끼리의 고통경쟁이자 자기 파괴이며, 누가 이기든 그곳에는 오직 패자만 있을 뿐입니다.

 

무나도 평범한 친구조차

요즘 시위 완전 폭력적이던데, 설마 너도 거기 갔었어?”라며 제게 안부 인사를 합니다.

 

학교에서 졸업사진 찍어야 하는데, 바람개비들 좀 잠깐 뽑으면 안 되나?

거슬리잖아한 마디 던집니다.

다른 한편에서 한 고등학교는 투신을 시도한 학생을 두고

 관심병이라는 교내방송을 내보냅니다.

무력함과 고통 속에 허덕이는 유가족들을 향해 순수한 유가족을 찾습니다

 

곰곰이 따져보면 서글픈 말들, 여전히 오고 갑니다.

여전히 너무도 많은 사람이 아프고 고통스럽건만 무감이 가득 찬 말들,

너무도 일상적으로 오고 갑니다.

눈을 감고 귀를 닫아도 숨 막히는 무관심과 방관, 조소와 냉담은 차고 넘칩니다.

그렇게 서로를 향한 무감이 너무도 익숙해져 버린,

 정작 조금은 무감해야 할 대상만을 맹렬히 좇는 게 너무도 당연해져 버린,

 그런 슬픈 무감의 공간에 살고 있습니다.

 

 

-참고문헌

 

김홍중, 2009 마음의 사회학(문학동네)

엄기호, 2010,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푸른숲)

한병철, 김태환 옮김, 2012 피로사회(문학과 지성사)

김홍중, 2015 서바이벌, 생존주의, 그리고 청년 세대: 마음의 사회학의 관점에서」 『한국사회학491

김훈, 1년째 수취인 불명남해의 부고선체 인양해 희망적 국면 열기를」 『이투데이, 2015410

박선영, 약자가 약자를 혐오할 때」 『한국일보, 201494

엄기호, 살벌함을 넘어」 『경향신문, 2015427

정희진, 잊힐 것이다」 『한겨례, 201558

출처 : 바람재들꽃
글쓴이 : 어진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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