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왕실의 태실 - <펌>
왕족이 태어나면 태를 태우지 않고 태항아리에 담아 태실에 모셨습니다.
조선시대의 왕릉은 왕궁에서 100리 안쪽에 써야 했으나 태실만큼은 거리 제한을 두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멀더라도 풍수의 명당을 찾아 태의 거처를 정했으니,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경상도 성주군 월향면 인촌리에는 무려 18위의 조선왕조 태실이 전해질 정도입니다. 인촌리의 서진산이 명당이었기 때문이지요. 당연히 그 산은 태봉으로도 봉해졌습니다.
태실의 사방 300보(약 500m) 거리에는 금표를 세워 강력히 보호했습니다. 모든 일은 관상감에서 관장하였고, 태의 호송과 태실의 역사는 선공감에서 도맡았습니다. 태를 봉송하는 책임자로 안태사 같은 벼슬을 내려 관리를 특별 파견했을 정도였습니다. 또한 석물을 설비하고 춘추로 제사를 지내는 등, 왕의 위엄에 걸맞게 태봉을 모셨습니다.
그러나 국가적으로 중요시했던 태를 일제가 그냥 둘 리 없었습니다. 일제는 수많은 태실을 마구잡이로 모아 들여 경기도 고양시에 위치한 서삼릉에 집결시켰습니다. 태실을 명당에서 들어내 민족정기를 진압하려는 일제의 정책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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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胎)항아리는 왕실이나 상류층 아기의 태를 담아 보관하던 항아리이다. 태호(胎壺), 태항(胎缸) 또는 태옹(胎甕)이라고도 한다.
예로부터 태는 태아의 생명력을 부여한 것이라 하여 함부로 버리지 않고 소중하게 보관하였다. 특히 왕실에서는 국운과 직접 관련이 있다고 믿어 태를 소중히 여겼다. 아기가 태어나면 길일을 택하여 태를 담은 내항아리와 내항아리가 들어가는 외항아리 그리고 출생과 태의 매장 시기를 기록한 지석(誌石, 또는 胎誌石)을 함께 묻은 다음 태비(胎碑)를 세웠다.
조선시대에는 태항아리가 대량으로 만들어져 사용되었다. 왕가에서는 아기가 태어나면 태를 즉시 작은 백자로 된 내호(內壺)에 넣어 산실(産室) 안에 미리 정해놓은 길한 방향에 보관하여 두었다. 내호는 태 안 항아리, 내항(內缸)이라고도 하며 외호에 비하여 홀쭉하게 생겼다. 그 뒤 길일을 택하여 태를 다시 보다 큰 중간 항아리인 외호(外壺)에 넣어 밀봉하였다. 외호는 태 밖 항아리, 태호(胎壺), 태항(胎缸), 외항(外缸)이라고도 부른다.
태를 처리하는 절차는 다음과 같다. 먼저 헌 동전 한 개를 글자가 적힌 부분(字面)이 위가 되게 조그만 내호 밑바닥 중앙에 깔고 여러 번 씻은 태를 그 위에 넣는다. 그리고 기름 종이와 남색 비단으로 항아리 입구를 덮고 빨간 끈으로 단단히 밀봉한다. 그것을 다시 외호라고 하는 더 큰 항아리에 담는다. 항아리 사이를 솜으로 채워 내호와 외호 모두 움직이지 않도록 고정시킨 후 습기가 스며들지 못하도록 기름종이로 싼 후 마개와 뚜껑을 닫아 막는다.
그리고 태실(胎室)이라 부르는 작은 언덕이나 봉우리의 명당 자리[태봉(胎封) 또는 아기 릉(陵)이라고도 부름]에 묻었다. 태실의 조성, 봉안, 운반, 일정, 인원동원, 소요경비, 경비부담자, 책임자 등등에 관한 상세한 내력은 『胎室義軌』를 작성하여 보관했다.
태항아리를 통해 태를 생명의 원천으로서 소중하게 여겼음을 살필 수 있다. 내호와 외호는 대개 분청사기 혹은 백자로 만들어졌는데 뚜껑과 몸체에 4개의 귀가 달렸고, 여기를 붉은 색 끈으로 단단히 묶어서 봉안했다.
왕실용 백자 태항아리는 15세기 후반 경부터 경기도 광주(廣州)의 번천리, 도마리, 우산리 등지의 요지(窯地)에서 주로 만들어 납품하였다. 이 유물은 일반 태항아리와 비교할 때 몸체가 길고 작다. 크기로 보아 태 안 항아리(內壺)일 가능성이 높다. 입 부분은 좁고 몸체는 어깨가 넓고 아래로 내려갈수록 좁다. 낮은 대접을 엎어놓은 듯한 둥근 뚜껑의 손잡이에는 석등형(石燈形) 꼭지가 있다.
조선의 '태실의궤'는 조선 왕실의 도서관 가운데 하나인 강화도 외규장각에 소장되다가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대가 다른 도서들과 함께 약탈해 가 지금 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 세종대왕 자태실에 대한 <문화재청 전문설명>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태봉(胎峰) 정상에 소재하는 세종대왕자태실은 세종대왕의 적서(嫡庶) 17왕자의 태실 18기와 세손인 단종의 태실을 포함하여 모두 19기로써, 그 조성시기는 조선 세종 20년(1438)에서 24년(1442)사이다. 전체 19기중 14기는 조성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나 세조의 왕위찬탈에 반대한 다섯 왕자의 태실의 경우 방형의 연엽대석(蓮葉臺石)을 제외한 석물이 파괴되어 남아 있지 않으며, 세조 태실의 경우에는 즉위한 이후 특별히 귀부를 마련하여 가봉비(加封碑)를 태실비 앞에 세워두었다. 1977년 태실에 대한 정비사업과정에서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분청인화문개(粉靑印花紋蓋) 2점(경북대학교박물관, 국립대구박물관 각 1점 소장), 분청인화문완(粉靑印花紋완) 1점(국립대구박물관 소장), 평저호(平底壺) 1점(국립대구박물관 소장), 지석(誌石) 3점(국립경주박물관 소장) 등이 있다.
재질은 화강암이고, 형식·구조는 연엽형의 개첨석(蓋첨石)(저경(底徑) 102㎝, 고(高) 42㎝), 구형(求形)의 중동석(中童石)(고(高) 26㎝, 하경(下徑) 80㎝, 상경(上徑) 75㎝), 방형(方形)의 연엽대석(蓮葉臺石)(변(邊) 125.5㎝. 고(高) 60㎝), 석함(石函)으로 이루어져 있다. 태실비문에 ‘ㅇㅇ(대)군명태장 황명연호연월일입석(ㅇㅇ(大)君名胎藏 皇明年號年月日立石)’이라고 음각되어 있으며, 세조가봉비 비문은 멸실(『실록』에 비문 수록됨)되었다.
우리나라에 있어 태를 봉안한 최초의 기록은『삼국사기(三國史記)』의 김유신의 장태(藏胎)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이후 고려의 왕실에서 태봉안 양식(胎奉安 樣式)이 성립된 후 조선시대까지 그 맥락이 이어진 오랜 전통을 가진 것으로, 태봉(胎峰)에 태를 봉안하기 위한 석물구성은 우리나라에서만 행해졌던 독특하고 독자적인 문화라 할 수 있으며, 세종대왕 자태실은 왕과 태장에 대한 태실만을 조성하던 고려시대의 태봉안 양식이 변화하여 왕과 왕비 및 그 자녀의 태실을 조성하기 시작한 조선시대 최초의 왕자태실로 그 의미가 높다 할 것이다. 태실의 조성 및 조성시기에 대해서는 『세종실록』의 기록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으며,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서 찾아지는 태실 관련 기록에서 언급된 산맥이 연결된 높은 봉우리가 아닌 들판에 홀로 우뚝 솟은 반구형(半球形)의 형태를 한 최적의 입지조건인 곳에 자리잡고 있다. 한편 세종대왕 자태실이 자리잡은 태봉은 당초 성주이씨의 중시조(中始祖) 이장경(李長庚)의 묘가 있던 곳으로, 왕실에서 이곳에 태실을 쓰면서 이를 이장하도록 하고 태를 안치하였는데, 여기에 관련된 전설이 현재 전해 내려오고 있으나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통해 보면 실제 사정과는 합치되지 않는 것으로 추정된다.
세종대왕자태실은 우리나라에서 왕자태실이 완전하게 군집을 이룬 유일한 형태일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태실의 초기 형태연구에 중요한 자료라는 점, 그리고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왕조교체와 함께 왕실의 태실 조성방식의 변화 양상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