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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

『난초잎에 어둠이 내리면』

by 정가네요 2023. 3. 1.

*

내가 유일하게 흠모했던 시인은

신석정 시인입니다.

 

신석정 시인이 돌아가시던 해에 저는 대학 1학년,

그해에 『난초잎에 어둠이 내리면』이란

유고 수필집이 나왔습니다.

 

대학생이 무슨 굳은 인생관이 있었을까마는

그 수필집을 읽고 저도 시인처럼 살고 싶었습니다.

 

지금 이렇게 시골에 들어와서

식물을 가꾸며 살게 된 원인을 굳이 찾자면

젊은 시절 국화를 잘 길렀던 저의 큰형님과

신석정 시인의 영향이 컸을 거라 생각합니다.

 

신석정 시인은 전원시인이니,

목가적 시인이니 하는 말을 싫어했다고 합니다.

그는 오히려 불의한 시대에 항거한 저항시인이었습니다.

 

실제로 일제강점기에 끝까지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

해방이 될 때까지 절필을 하다가 해방 후에

시집을 낸 것만 봐도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제2시집인 『슬픈 목가』엔

해방 직전의 암담한 현실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번에 저는 지인들과 2박 3일로 전라도 기행을 했는데

이매창의 무덤을 찾고 석정문학관에 들르게 되어

뜻하지 않게 문학기행이 되었습니다.

 

석정문학관에서 안내인의 설명을 들으며

전시관을 돌던 중 내가 대학생 때 읽었던 수필집

『난초잎에 어둠이 내리면』을 발견하여 정말 반가웠습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책장을 뒤져 낡은 그 책을 찾았습니다.

몇 번의 이사로 너덜너덜해진 겉표지를 벗겨버렸는데

책장을 넘기니 50년 세월에 가름끈(책갈피)이 툭 끊어지네요.

 

1974년에 발간된 수필집엔 꽃 얘기가 많이 나옵니다.

40평 남짓한 뜰에 30여 종의 나무를 심고

숙근초는 물론이고 항아리에는 백련까지 심었습니다.

 

그분이 꽃을 얼마나 좋아했는지는

백련 얘기 하나만으로도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항아리에 가람 이병기 선생 댁에서 옮겨 심은

백련이 7년 만에 꽃을 피우자

친구들을 불러 매실주를 마시며 청담을 나누었는데

꽃잎을 헤아려 보니 20개가 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또 한 송이의 백련이 꽃피려 하니

백련의 개화를 보기 위해 친구와 계획했던

제주도 여행까지 취소하려 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꽃을 사랑했던 신석정 시인은

예순여덟의 나이에 고혈압으로 삶을 마감했습니다.

전주시 남노송동에 작은 뜰이 달린 초가를 한 채 사서

‘비사벌초사’라 이름 짓고 살았던 신석정 시인.

 

태산목과 시누대, 백련과 청매를 사랑했던 신석정 시인,

한평생 궁핍한 선비로 살았던 그가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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