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nongmin.com/opinion/OPP/SWE/FST/338832/view
지금까지 쓴 시들 중에 나무에 관련된 시편이 많아서 그랬을까. 언젠가 후배 시인은 나를 ‘나무의 사제’라고 불렀다. 그래서 나는 “아닐세. 당치도 않네. 나는 나무의 신도일 뿐이네”라고 대꾸한 적이 있다.
내가 사는 지역엔 노거수(老巨樹)라 불리는 나무들이 제법 많다. 올봄엔 감염병 여파로 사람 만나기가 쉽지 않아 주변의 노거수들을 자주 찾아가 쉬다 오곤 했다. 얼마 전엔 강원 원주시 문막읍에 있는 800년이 넘은 반계리 은행나무를 만나고 왔고, 또 한번은 가까운 곳에 있는 시(市) 보호수인 대안리 느티나무를 만나러 갔다. 느릿느릿 산보 삼아 걸어도 느티나무가 있는 산자락까지는 3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수령 350년이 넘었다는, 연두에서 초록으로 잎 색깔이 바뀐 느티나무. 해넘이 직전 장엄한 노을을 몸에 걸친 느티나무. 나는 나무 밑에 서서 늠름한 자태의 느티나무를 우러르고 있는데, 얼마 전 책에서 읽은 이야기 한토막이 떠올랐다.
나무 앞에만 서면 가슴이 설렌다는 나무 인문학자 고규홍씨는 충북 보은에 있는 오래된 고욤나무를 만나러 갔단다. 나무 부근에는 작은 암자가 있었는데, 그 암자를 지키는 스님이 고욤나무를 만나러 온 그에게 물었다. “나무에 가지가 많은 이유를 아십니까?” 느닷없는 스님의 질문에 그는 금방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러자 스님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나뭇가지의 숫자는 나무가 더불어 살아가는 다른 생명체와 소통하기 위한 욕망의 크기라오.”
우람한 몸집의 느티나무를 다시 올려다보니, 원줄기에서 뻗어나간 잔가지들이 무량무량 많았다. 그래, 저 숱한 나뭇가지들이 뭇 생명체와 소통하기 위한 욕망의 크기란 말이지? 나는 문득 가슴이 벅차오르며 한 소식 들은 기분이었다. 늘 아상(我相)에서 자유롭지 못한 내가 풀과 나무가 있는 숲에만 기대면 편안해지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첨단 문명의 편리와 혜택을 누리면서 인간들은 마치 신이라도 된 양 한껏 거들먹거리며 살아오지 않았던가. 풀이나 나무 같은 생명들이 뭇 생명체들과 자연스레 교감하며 소통하는 삶의 방식을 애써 외면하면서 말이다. 그런 잘못된 삶의 방식이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사태를 겪으면서 들통나게 된 것.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지만, 어쩌면 우리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보다 더한 재난이 일상이 되는 시절을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 집 당호는 ‘불편당’이다. 불편도 즐기고 불행도 즐기자는 다짐으로 살아가려고 붙인 이름이다. 그렇게 이름을 붙이고 나니, 잡초를 뜯어 먹고 틈틈이 숲길을 걷기도 하면서 불편한 야생의 삶을 받아들이며 사는 게 훨씬 수월해졌다.
그동안 우리 인간들은 편리와 속도와 효율이라는 인간 중심의 가치에 매몰돼 지구의 다른 생명체들과의 공존공생을 너무 도외시하고 살아왔다. 그 결과 우리는 이전에 겪어보지 못한 전 지구적 재난에 직면하게 됐다. 이런 재난에 동참하면서 절실하게 드는 생각은, 신이 이런 재난을 통해 영적으로 잠든 인류를 깨우고자 하는 게 아닐까.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해 느티나무에 작별을 고하고 떠나려 하는데, 갑자기 꿀벌들이 윙윙거린다. 내가 앉아 있던 나무 둘레에 꽃이 피어 있었던 것. 그래, 꿀벌에게 꽃은 언제나 희망이지. 나는 윙윙거리는 꿀벌들의 채집 순례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얼른 일어나 자리를 떴다.
고진하 (시인·잡초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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