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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나무 훼손 논란.. 도로 확장공사 중단된 비자림로
숲은 여전히 푸르렀다. 어둑한 나무 그늘 아래로 드문드문 차 소리가 진동했다. 면도칼로 도려낸 듯한 숲의 절개면은 도로와 그대로 잇닿아 있었다. 사라진 숲은 도로의 일부였고, 나무 그늘 아래 도로는 숲의 일부였다. 비자림로라 불리는 이 길은 제주도 구좌읍 송당리 칡오름과 거슨세미오름 사이를 지나는 지방도 1112호선. 일생을 도로와 함께했던 삼나무들이 지난 8월 개발을 이유로 송두리째 베어지면서 섬 바깥에까지 그 이름이 알려졌다. 요란했던 도로확장 공사는 일시 중단됐다. 915개 그루터기만 덩그러니 남았다.
한해 제주도를 찾는 관광객은 1500만명에 달한다. 68만 제주도 인구의 스무 배가 넘는다. 제주 관광은 짧은 시간에 양적 팽창을 이뤘지만, 도로나 수도 같은 도시 인프라는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서영표 제주대 사회학과 교수는 “비자림로 사건이 관광에 대한 제주의 수용능력이 한계에 도달했다는 걸 보여준다”면서 “관광산업을 활성화한다는 미명하에 이루어진 난개발이 교통정체나 자원고갈 등 여러 가지 형태의 부작용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2010년대 들어 활성화한 저비용항공은 중국 관광객의 폭발적 증가와 더불어 제주도의 포화를 부추겼다. 서 교수는 “오버투어리즘(과잉관광)으로 인해서 생태, 사회, 문화 기반이 한꺼번에 파괴되고 있다”며 “제주도가 관광지이기 이전에 삶의 터전이라는 인식을 공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비자림로 공사에서는 도로확장의 타당성 여부가 가장 큰 쟁점인데도, 엉뚱하게 삼나무의 유해성 논쟁으로 번졌다는 분석도 나온다. 원희룡 제주도지사는 지난 9월 열린 제364회 제주특별자치도의회 정례회에서 꽃가루 알레르기 등을 이유로 들며 삼나무가 베어버려야 할 골칫거리임을 강변했다. 녹색당 안재홍 사무처장은 “문제의 발단은 도로확장이고, 제주도의 과잉관광과 난개발로 논의가 확장돼야 한다”며 “삼나무라는 수종 자체를 부각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흐리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그동안 우리가 사랑해 마지않았던 숲과 나무를 부정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서울에서 비자림로를 찾아온 여행객 허모(32)씨는 안타까움을 전했다.
제주시가 지난 10월 18일 하루 동안 제주시 구좌읍 대천교차로~금백조로 입구 구간의 일일 교통량을 조사한 결과 1만440대로 집계됐다. 고희범 제주시장은 조사 결과를 근거로 “하루 교통량이 1만대를 넘어선 비자림로의 확장은 지역주민들의 숙원 사업”이라면서 말을 바꿨다. 반면 제주도 교통정보센터 통계정보(2018년 10월 기준)에 따르면 도로확장 공사 구간을 포함하는 대천동사거리(대천교차로)~송당사거리의 상·하행선 일평균 통행속도는 하루도 빠짐없이 50㎞/h를 웃돌며 ‘소통원활’을 기록했다. ‘비자림로를 지키기 위해 뭐라도 하려는 시민모임’의 윤경미(48) 회원은 “도로를 2차선에서 4차선으로 확장하여 평균 시속을 10㎞/h 높인다고 가정했을 때, 약 20초의 시간 단축 효과가 기대된다”며 “20초를 위해 30년 묵은 나무 2000여 그루를 자르고, 207억원의 예산을 쓰는 게 타당한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언제 다시 확장공사가 시작될지 모르는 비자림로에는 빠름에 대한 욕망과 느림에 대한 혐오가 뒤섞여 있었다.
“오늘도 제주에서는 ‘제2의 비자림로 공사’가 이어지고 있다.”
시민단체인 ‘곶자왈사람들’ 김정순 대표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난개발이 훨씬 많다고 주장한다. 김 대표는 “제주의 얼마 남지 않은 곶자왈 숲에 채석장과 골프장을 비롯한 관광 시설이 무분별하게 파고들고 있다”면서 “곶자왈은 한번 훼손되면 복원할 수 없는 유한자원”이라고 우려를 표했다. 곶자왈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열대 북방한계 식물과 한대 남방한계 식물이 공존하는 제주도의 독특한 숲이다. 암석이 얼기설기 쌓이면서 투수성이 뛰어난 곶자왈의 지질 특성은 수자원이 넉넉지 않은 제주에 지하수를 공급하는 원천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곶자왈이나 람사르습지인 동백동산(제주시 조천읍) 인근에 사자와 코끼리, 하마, 코뿔소 등 야생동물 1000여 마리를 사육하는 ‘사파리월드’ 조성사업이 추진되면서 분뇨 처리 등으로 인한 환경 훼손 논란이 일고 있다. 곶자왈 경계 설정 등의 문제로 사업에 제동이 걸린 상황이지만, 언제 선흘곶자왈 지대가 초대형 동물원으로 전락할지 모르는 일이다.
‘사람이 살기 좋은 곳이 여행하기 좋은 곳’이라는 명제는 제주도에서도 유효할 수 있을까. 제주도가 관광지로 개발될수록 주민은 행복해질까. “관광이 일어나기 전 비자림로는 그 자체로 충분했다.” 송당리에서 책방을 운영하는 김키미(38)씨는 “도로를 넓혀 관광객을 더 유치하고자 하는 도정의 개발정책은 주민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면서 “각자 방식으로 마을을 사랑하는 주민들의 마음이 갈등이라는 정치 구도에 이용당해왔다”고 설명했다. 김씨는 “도로가 자본과 개발의 통로가 아닌 소통의 창으로서 변치 않고 우리에게 인식되면 좋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