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생각] 이숙인의 앞선 여자
일러스트 장선환

황진이는 시와 노래로 일세를 풍미했던 16세기의 여성이다. 그 존재감이 얼마나 대단한지 5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식을 줄 모르고 있다. 남한에서는 그녀를 주제로 한 소설·영화·오페라 등의 작품이 20편이 넘게 나왔고, 북한에서도 개성에 있는 그녀의 무덤을 복원하여 당원과 근로자 그리고 어린 학생들의 방문을 받고 있다고 한다. 역사 인물 황진이는 곧 남북한 공동의 자산인 셈이다.

그런데 자료를 주의 깊게 살펴보면 황진이의 많은 부분은 실재라기보다 허구에 가깝다는 것을 알게 된다. 1505~1506년 즈음에 태어나 40년 가까이 살다 1544년 사망한 중종 연간의 인물이라는 것 외에 출생이나 행적들에 대해서는 이야기마다 제각각이다. 심지어는 그녀의 정체성이기도 한 황씨 성(姓)이나 진사의 서녀라는 것도 19세기 말에야 나온다. 진(眞)이 살아서 돌아온다면 자신이 왜 황씨가 되었는지 의아할 법도 하다. 물론 세월이 갈수록 부풀려지거나 새로워졌다는 것이지, 그 존재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그녀의 시에 등장하는 벽계수나 소세양 등도 존재를 증명해주는 사람들이다. 어디까지가 그녀이고 어디부터가 이야기일까.

황진이는 허균(1569~1618)의 <성소부부곡(惺所覆?藁)>에서 진랑(眞娘)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소개되었다. 책이 1613년에 나왔으니 그녀가 죽은 지 60년도 더 흘렀다. 이에 의하면 진랑은 맹인의 딸로 태어나 거문고에 능하고 노래를 잘했다. 남자처럼 뜻이 크고 기개가 있었고, 산수 유람을 좋아하여 금강산과 태백산, 지리산 등을 다녀왔다. 지역의 명사 화담 서경덕(1489~1546)을 존경하여 거문고와 술을 가지고 가 그의 농막에서 놀다 오곤 했다. 또 30년을 수양해 온 지족선사를 유혹하여 그 지조를 꺾었다며 자랑하고 다녔고, 스스로 송도삼절(松都三絶) 중의 하나로 자부했다. 허균의 아버지 허엽(1517~1580)이 서경덕의 문인(門人)이고 보면, 허균이 전하는 진랑 이야기는 사실일 수도 있겠다.

이후 나온 여러 종류의 황진이는 사실상 허균의 각주에 불과하다. <송도기이>에서는 금강산 유람에 재상가의 아들 이생원을 동행하며 길에서는 노래를 팔고 절집에서는 몸을 팔아 끼니를 해결한 것으로 나온다. 또 소리 명인 이사종을 만나자 즉석에서 6년간의 동거를 제안하여 3년의 생활비는 진이가 대고 다음 3년은 이사종이 대기로 하여 칼같이 실행에 옮겼다고 한다. 그녀는 기생이지만 성품이 고결했고 화려한 치장을 좋아하지 않았다. 관부에서 주최하는 술자리에 불려 나갈 때면 빗질과 세수만 하고 나가지만 자신의 전공인 노래로 승부수를 던졌다. 인품이 빠진 시정잡배는 천금을 준다 해도 상대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무엇을 근거로 만들어졌을까.


시가 주는 감동이 인간 황진이를 살려내지 않고는 못 배겼을 것이다. 우선 그녀는 시와 음악으로 당대 지성과 예술의 최고봉이었다. 그녀가 남긴, 그리움이나 이별의 시들은 세기를 초월해 사람들의 심중을 파고들었다. 즉 만날 길이 꿈길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그녀의 시 <상사몽>은 길벗이 되었고, 가곡 <꿈>으로 되살아났다. 황진이를 고결한 품격과 기개를 지닌 인물로, 돈과 권력에 굴하지 않은 자유정신으로 이야기해 온 것은 근거가 없지 않았다. 그녀가 남긴 시를 통해 그녀를 읽어낸 것이다. 황진이는 신분에 자신을 가두기보다 신분을 넘어선 자신을 만들며, 세상의 편견과 시선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내었다. 그녀가 남긴 시와 당찬 일화들을 토대로 새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야담집에서 예술작품으로 황진이의 탄생은 계속되고 있다.



-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