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 https://www.nongmin.com/plan/PLN/SRS/293041/view
[전원에서 띄운 편지] 놀라운 기적
도서관서 강연 초청받고 청중 적을까봐 걱정했지만 시작되자 강당 가득 메워
농부 말에 경청하는 모습 보며 숭고한 농사의 가치 전해
산과 바다가 잘 어우러져 눈부시게 아름다운 경남 남해의 남해도서관에 가서 사람들 만날 생각을 하니 이른 아침부터 마음이 설렜습니다.
가끔 산골 농부를 귀하게 여겨주는 학교·도서관에서 강연을 해달라고 할 때 바쁜 농사철만 아니면 “예” 하고 달려갑니다. 나이가 더 들면 어디 가고 싶다고 갈 수 없을 테고, 누가 불러주지도 않을 테니 말입니다. 더구나 학교나 도서관에서 문학이 어쩌고저쩌고하는 이야기보다, 농업과 생명에 대한 이야기를 해달라고 하면 더욱 마음이 설렙니다.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을 만나는 일과 먹고사는 일보다 더 소중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무엇 하나 내세울 것도 없는 산골 농부와 함께 희망을 찾아보자고 하는데 어찌 기쁘고 설레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이름난 강사가 온다 해도 스스로 잘나고 똑똑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용기 있고 겸손하고 슬기로운 사람만이 남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남의 말에 가만히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사람만이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말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시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열린 강연’을 주최하는 쪽은 몇사람이나 올까 마음을 졸이고 애가 탑니다. 몇달 전부터 준비한 강연인데 사람이 모이지 않으면 다음 강연을 준비하는 데도 어려움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강연이 오후 2시부터였는데, 10분 전엔 열명쯤 모였습니다. 5분 전엔 서른명쯤 모였습니다. 다행스럽게도 2시가 지나자마자 도서관 강당이 보기 좋게 가득 찼습니다. ‘아, 다행이구나! 농부 말에 귀를 기울여주는 사람이 남해에도 있구나!’ 싶어 한결 마음이 편안했습니다.
이름난 가수나 배우가 온다고 하면 수백 수천명이 몇시간 전부터 모여 야단법석을 떨기도 하지만, 농부인 저는 사람이 열명 모여도 좋고 스무명이 모여도 좋습니다. 때론 사람이 적게 모여야 알찬 시간을 가질 수 있으니까요. 한분씩 나와서 좋아하는 시를 읽기도 하고, 시를 쓰기도 하고, 시를 듣고 느낀 마음을 나누기도 하면서 말입니다. 가까운 마을에 소풍 온 마음으로 도서관을 찾아온 사람들한테 물었습니다.
“남해에는 마늘과 고사리를 많이 심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여기 오신 분 가운데 농사지으며 사는 분이 있습니까?
미안하지만 손 한번 들어주시겠습니까?”
여기저기서 열명 남짓 손을 들었습니다.
“그럼 태어나서 지금까지 상추씨든 무씨든 한가지라도 자기 손으로 심어본 사람이 있으면 손 한번 들어주시겠습니까?”
스무명쯤 손을 들었습니다.
“그럼 한번도 손을 들지 않은 사람은 씨앗 하나 심어본 적이 없다는 게지요?
사오십 년 살아오면서 나를 살리고 식구들을 살린 음식을 모두 돈을 주고 사 먹었다는 말씀이지요?
그렇다면 오늘부터 상자텃밭을 만들거나 구해서 상추씨라도 심어보시기 바랍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흙을 만지고 씨를 뿌리고 자식 키우듯이 물을 주고 정성껏 가꾸다보면 농부의 마음을 느끼게 되고,
느끼게 되면 생각이 달라지고, 생각이 달라지면 삶이 달라지고,
삶이 달라지면 물과 햇볕과 지렁이 같은 자연과 생명에 대한 고마운 마음이 들고, 고마운 마음이 들면 머리가 숙어지고,
머리가 숙어지면 ‘사람 마음’을 되찾게 되고, 사람 마음을 되찾게 되면 여태 가슴에 맺힌 상처가 낫게 되고,
가슴에 맺힌 상처가 낫게 되면 지친 몸이 낫게 되고, 지친 몸이 낫게 되면 가정이 편안해지고,
가정이 편안해지면 모든 걱정이 사라질 것입니다.
이렇게 씨앗을 심고 가꾸는 ‘기적 같은’ 일을 농촌에 사는 농부만 해서야 되겠습니까?
농촌이든 도시든, 아이고 어른이고 누구나 해야만 합니다.”
도서관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집으로 돌아왔는데, 산골 들녘엔 오늘도 늙은 농부들만 비지땀을 흘리고 있습니다. 산이나 들에서 마음껏 뛰놀아야 할 아이들은 도시 시멘트 건물 안에서 ‘경쟁’이라는 괴물에 홀려 ‘공붓벌레’가 됐는데도, 대숲에서 텃새들은 마냥 노래를 부릅니다. 씨앗을 뿌리고 가꿀 아이들을 기다리며….
서정홍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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