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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 소개

숲에게 길을 묻다 / 김용규

by 정가네요 2017. 12. 19.



*

아주 좋은 책 한 권을 읽었습니다.

오후 내도록 책의 내용 중 많은 부분을 옮겨 적었습니다.^^*

소개합니다.


숲에게 길을 묻다 / 김용규


숲에게 길을 묻다                                                    


* <목차>


1장. 태어나다 - 선택할 수 없는 삶, 태어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생명|모든 생명은 자기답게 살 힘을 지니고 태어난다
|숙명|숲에는 태어난 자리를 억울해하는 생명이 없다
|운명|노예로 살 것인가| 주인으로 살 것인가|
|수용과 출발|시작하라! 거목 아래 신갈나무처럼, 담장 앞 담쟁이덩굴처럼

2장. 성장하다 | 내 모양을 만드는 삶, 성장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꿈|나무에게는 빛, 사람에게는 꿈
|버림과 상실|두려워하지 마라! 들풀도 떡잎을 버려야 꽃이 핀다
|상처|담담하게 지니고 있는 상처야말로 그다운 향기다
|경쟁|다퉈라! 그러나 제대로 다퉈라!
|관계|성장을 위한 ‘아름다운 생명의 그물망’
|경계|경계로 가라! 그곳에 누군가의 길이 있다
|혁명|버려진 땅을 골라 자신의 영토를 세우자

3장 나로서 살다 - 나를 실현하는 삶, 나로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소통| 꽃의 유혹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배려!
|사랑|따로 또 같이, 사랑하려면 혼인목과 연리목처럼
|자식|품 안에 둘 것인가| 멀리 떠나보낼 것인가|
|일|식물의 방식으로 일할 수 없다면 참된 일이 아니다
|휴식|회화나무의 기품, 자귀나무의 금실
|상생|홀로 숲을 이룰 수 있는 나무는 없다
|저장과 공헌|아낌없이 주어라! 나무처럼, 풀처럼

4장. 돌아가다 | 다시 태어나는 삶, 돌아간다는 것은 무엇인가|

|순환|죽음이 삶의 끝자락에 배치된 이유
|정리|-남겨 아름답지 못한 것들
|놓음|-썩어져라! 한 순간도 살지 않은 것처럼
|죽음|두려워할 일은 죽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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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한동안 아주 많은 사람들이 걷는 길을 의심 없이 걸어왔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보다 먼저 그 길을 더 빨리, 더 멀리 걷기만 한다면 우리의 삶이 훌륭해질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신자유주의가 지향해온 이 길을 많은 사람들이 의심 없이 걸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길이 곧 희망일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이제 더 이상 희망이 되지 못하는 길로 판명이 났습니다.

 

루쉰은 많은 사람이 걸어가는 곳이 길이 된다 했지만, 그 길이 반드시 내게도 희망일 수는 없습니다. 그 길이 내게 더 이상 희망일 수 없을 때, 그 길은 죽은 길이 되고 절망이 됩니다. 한때 희망이라고 믿었던 길 위에서 우리는 지금 절망의 벽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나도 한때 걷던 길 위에서 그런 곤란함과 대면한 적이 있습니다.(...)

그 길은 희망 아닌 것들이 나의 희망을 대신하는 길이었습니다.

그 길 위에서 더 이상 희망일 수 없는 지점에 다다랐을 때 나는 그 길을 버리고 새로운 길 위에 서기로 결심했습니다. 기업이라는 조직을 떠나기로 했고, 도시를 버리기로 했습니다. 삶의 굽이를 따라 흐르다가 까맣게 잊었던 꿈, 버려야 했던 꿈을 되살려 불러내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삶은 그런 것입니다. 자기 호흡대로 숨 쉴 때 삶은 정말 행복해집니다.

 

이 책은 나무와 들풀이 중심을 이루고 다른 존재들이 어울려 사는 숲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또한 이 시대를 사는 우리 자신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길에 대해 묻고 있는 책입니다. 숲 생명체들의 삶을 통해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새로운 길을 찾고자 모색하는 책입니다. 또한 새로운 길 위에 서려는 이들이 자신에 대한 용기와 희망을 얻을 수 있는 책입니다. 그러니 이 책은 숲에게 길을 묻는 책입니다. 숲에서 엿본 삶과 죽음의 지혜를 우리 인간의 지혜로 삼자고 제안하는 책입니다. 그 지혜를 자기경영의 전략으로 삼아보자고 권하는 책입니다.

그간 우리는 희망 아닌 것들로 우리의 희망을 채웠는지도 모릅니다. 숲의 가르침을 전하며 나는 오직 희망인 것들로 그대의 삶이 가득 채워지기를 기도합니다.

 

학교나 학원, 혹은 유명하다는 전략 강좌 따위에서는 답게 살 수 있는 어떠한 지혜도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그곳에는 삶을 조금 더 편하게 다룰 수 있는 도구만이 있을 뿐, 나답게 나를 꽃피우며 사는 데 필요한 가르침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예상치 못한 폭풍우나 가뭄, 혹은 혹한이 우리 삶을 가로지르며 끼어들 때 그동안 배웠던 도구와 기술과 지식은 무용했고, 더러 짐이기까지 했습니다.

 

로서 살고자 하는 이라면 라는 씨앗 안에 이미 담겨 있는 놀라운 힘을 회복해 나가야 합니다. 본래의 나를 만나야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우리는 그러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본래의 나를 찾아 균형을 회복하지 못하는 이유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내가 나를 만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길을 잃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에 가득 찬 사람들은 하늘이 생명체 모두에게 넣어주신 그 신비로운 능력을 믿지 못합니다. 모든 생명이 그러하듯, 우리 또한 변화에 대처할 수 있는 힘을 이미 스스로의 씨앗 안에 지니고 있는데도, 우리는 그것을 믿지 못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길을 잃을까 두려워 다른 사람들이 걷는 길을 졸졸 따르기만 합니다.

하지만 로서 살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길을 잃을까 두려워 할 이유가 없습니다. 생명 모두는 언제나 길을 잃음으로써 자신의 진정한 길을 찾기 때문입니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말처럼 길을 잃어 보기 전에는, 다시 말해서 세상을 잃어버리기 전에는 자기 자신을 찾아내지도, 자신이 지금 서 있는 위치와 자신이 맺고 있는 무한한 관계를 깨닫지도 못하는 것이 삶이기 때문입니다.

 

혹시 그대도 살면서 태어난 자리가 억울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퍽 오랫동안 그런 분노를 안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숲의 생명체들이 걷는 길을 보면서 생각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숲 속의 식물들이 각자 씨앗이 떨어진 자리에서 제 삶을 살아내는 모습을 수도 없이 보면서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숲은 그 생명체들이 숙명을 대하며 살아가는 방식을 보여줌으로써 오랫동안 내 가슴을 차지했던 억울함을 씻어주었습니다.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삶을 대할 수 있게 도와주었습니다.

아직 이 마음에 공감하지 못하는 그대라면 억울한 생각을 잠시 내려놓고 조금 더 숲의 가르침에 귀 기율여보면 좋겠습니다. 숙명이 지천인 숲이라지만, 생명 각자는 발아한 그 자리에서 눈부시게 아름다운 그들만의 삶을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나는 아직 주어진 자리가 억울하다고 분노하는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숲에 기대어 사는 삶을 시작하면서부터 숲은 나에게 스승이 되어 주었습니다. 그의 가르침을 얻기 위해 내게 필요했던 것은 다만 더 나은 삶을 위한 기술과 기교를 내려놓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생명의 태어남은 바로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를 알고 수용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생명 모두가 쉽고 편안하고 품위 있고 풍요로운 삶이 보장되는 자리를 차지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그러한 자리와 삶만이 가치 있고 중요한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자본과 산업, 교육을 통해 수없이 그렇게 세뇌되어 왔지만, 쉽고 편안하고 품위 있는 자리만이 훌륭한 자리가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저마다의 자리에서 저다운 모습으로 삶을 영위하는 것입니다.

 

식물에게 빛이 절대자이듯, 인간에게도 빛은 또 다른 의미에서 절대자입니다. 식물이 태양을 향함으로써 살아갈 수 있는, 근본적인 힘을 얻듯이 빛은 인간이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가장 강력한 힘이 됩니다. 인간이 자기를 실현하기 위해 견지하는 빛, 그 빛을 우리는 꿈이라 부릅니다. 꿈을 갖는다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작은 꿈일지라도 강력합니다. 식물은 지구로 유입되는 태양에너지의 0.2퍼센트만으로 잎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마찬가지로 꿈은, 우리 마음의 0.2퍼센트에 불과한 자리를 차지할지라도, 우리의 심장을 뛰게 하고 우리를 고난에 맞서게 하는 근원적인 힘이 됩니다. 꿈이 없는 삶은 사실 살아 있으되 살아 있지 못한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꿈을 상실한 사람은 어둠에 갇힌 사람이고 목적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는 사람이며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꿈을 찾아 결코 놓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내리 쬐는 햇살은 가득한데 내 영혼에는 한 가닥의 햇살도 닿지 못했습니다. 내 내면의 깊은 곳에 닿아 있는 나다운 꿈은 사라지고 사회를 지배하는 자본적 가치에 대한 열망만이 나를 깊숙이 좀먹었기 때문입니다. 몇 년 뒤, 운 좋게도 나는 그 어두움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새로운 꿈을 모색하면서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새로운 꿈의 영역에 대해 나는 다른 사람들과 좀 다르게 생각했습니다. 내가 정말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는 것, 빠른 것보다는 느린 것, 쉽게 변하는 것보다는 잘 변하지 않는 것, 크고 화려한 것보다는 작고 소박한 것, 나 하나만을 살찌우는 것보다는 모두를 살찌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 사색하고 연구하기 시작하고부터 몇 년 지나지 않아 나는 새로운 꿈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도 이렇게 이 숲에서 저 태양을 맞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겪어보니 꿈을 품고 산다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그래서 모두들 자기를 닮은 꿈 하나를 깊이 간직하고 살아가기를 권합니다. 이왕이면 우리의 꿈이 빛을 탐하는 식물을 닮았으면 좋겠습니다. 식물들에게는 과한 꿈이 없습니다. 나무와 들풀은 오로지 자신을 꽃피우려는 꿈, 그래서 어떻게든 열매를 맺는 것으로 자신이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이유를 증명하려 합니다. 나무는 숲을 모두 지배하려는 욕심을 품지 않습니다. 들풀은 제 자리가 아닌 곳을 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갖는 꿈도 그렇게 나무를 닮아서, 들풀을 닮아서 과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로지 자기다움에서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생명체에게 꿈이란 하늘 한 자락을 마음껏 바라볼 수 있는 자신만의 공간을 갖는 것임을 우리 모두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무가 겪는 폐기와 상실은 모두 모색의 결과입니다. 때로 그것이 실수나 실패로 이어진다 해도 모색 없이는 기품 있는 수형을 이룰 수 없습니다. 오늘날 산천의 많은 노거수들이 보여주는 기품 있는 모습은 수많은 모색의 결과입니다. 힘들게 키워낸 잎과 가지와 줄기를 폐기해버린 결과입니다.

 

사람이라는 생명체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수많은 시도와 모색을 하고, 때로 실패와 손실을 감수한 뒤에야 그리워하던 모습을 그려낼 수 있습니다. 때로는 공들여 뻗었던 소중한 잎과 가지를 버리거나 잃어야 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나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도 버림과 상실 없이는 이어질 수 없음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나무가 버린 가지와 낙엽이 땅을 뒹굴며 썩어감으로써 삶의 자양분이 되듯이, 덕분에 삶이 다시 튼튼해지고 성장하듯이, 우리의 삶도 실수와 실책을 통해 나를 만나고 성장하도록 짜여진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는 가시를 떨어뜨린 나무들을 찬찬히 살펴본 후 그들이 가시를 버린 이유를 알았습니다. 즉 스스로를 지킬 힘이 생긴 나무들만이 가시를 버렸던 것입니다. 동물들에게 쉬이 꺾이지 않을 만큼 자신의 줄기를 살찌웠을 때 비로소 그들은 그동안 키워온 가시를 떨어뜨렸습니다. 자라면서 그들은 가시에 쏟아 부었던 에너지와 양분을 차단했습니다. 그러면 가시는 자연스레 삭다가 어느 순간 툭 하고 떨어졌습니다. 그러면 가시가 있던 자리는 말끔하게 껍질로 덮였습니다.

 

그러나 사람이건 나무건 가시가 가득하면 가까이 하기에 꺼려집니다. 그것은 인지상정입니다. 결국 가시를 가득 단 자는 더불어 살기 어려운 대상이 되고 맙니다. 따라서 그 분노를 자신을 넓히고 키워내는 에너지로 바꿔야 합니다. 가시를 다는 것이 분노와 좌절의 에너지라면, 가시를 떨어뜨릴 수 있을 만큼 자신의 키를 키우고 줄기를 살찌우는 것은 자기 성장의 에너지입니다.

 

진달래와 철쭉은 봄철에 분홍색의 비슷한 꽃을 피웁니다. 그러나 개화 시기는 진달래가 철쭉보다 약 보름 정도 빠릅니다. 어느 생태학자는 진달래와 철쭉의 개화 시기가 같았을지도 모른다고 추정합니다. 그러나 서로가 더 좋은 결실을 맺기 위해 개화 시기를 달리하게 되었다는 거지요.

 

오늘날 우리가 벌이고 있는 경쟁은 창조주의 뜻과 너무 다르게 흐르고 있습니다. 생명을 지속하고 풍요롭게 하는, 생태계의 원리로 부여된 경쟁의 양상은 우리 인간의 숲에서는 빠르게 꺼져가고 있습니다. 오로지 나를 변화시켜 나를 실현하고, 그를 통해 더 퐁요로운 생명공동체를 이루도록 고안된 경쟁의 원리, 그 건강한 경쟁의 긍정성은 점차 상실되어가고 있습니다.

 

 

생명은 오직 연대와 관계 속에서만 생명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자연의 법칙입니다.

 

분명합니다. 생명은 그렇게 아주 복잡한 관계의 망으로 얽히고 설켜 살아가야 합니다. 그 복잡한 관계 망 속에서 누군가를 돕고, 누군가의 도움으로 자라고 꽃피우고 열매 맺으며 성장하도록 되어 잇습니다. 생태계는 그 자체로서 아름다운 생명의 그물망인 것입니다.

17세기 영국의 시인 존 던은 인간은 어느 누구도 그 자체로서 온전한 하나의 섬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기대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생명체는 이 별에 없습니다. 지금 세상에 횡행하는, 오로지 자신의 배만 불리고 제 영혼만 살찌우면 된다는 생각은 너무 어리석고 위험한 믿음입니다. 강자만이 살아남는 세상은 욕심이 지나친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허구입니다.

 

사회적으로 중심에 있지 못한 사람들이 가난을 죄처럼 끌어안고 살아야 하는 구조가 강화되고 확산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성장하는 것이며, 재생산하는 것이며, 그리고 우리의 이웃과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공생에 대해 연구하는 톰 웨이크퍼드의 이 말은 틀림없는 진리입니다.

 

지금 세상은 모두에게 주류의 삶을 살라고 합니다. 모두가 숲의 한복판에서 가장 큰 키를 키우고 가장 화려한 꽃을 피워야 훌륭한 삶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모두가 숲의 한가운데를 차지할 수는 없습니다. 모두가 중심이 되기를 원한다면, 세상은 더욱 치열하고 각박해질 뿐입니다. 모두가 주류라 부르는 삶을 살 이유도 없습니다. 누군가는 그토록 아름다운 경계의 길을 걷도록 태어난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두가 세상의 중심부에 갇혀 살 이유가 없습니다. 그저 저답게 살 수 있는 공간을 찾아 저답게 자라고 저다운 꽃을 피우면 족합니다. 그것으로 각자는 행복하고, 생명의 공동체는 더욱 풍요롭게 지속되는 것입니다. 창조주의 뜻이 분명 그곳에 있을 것입니다. 나는 그렇게 믿습니다. 그렇기에 나는 언제나 경계의 삶을 즐거워합니다.

 

이 숲의 오솔길을 따라 걷노라면 질경이와 생강나무를 비롯한, 수많은 혁명적인 생명들과 매일 마주합니다. 사람의 숲에서도 이따금 질경이나 생강나무를 닮은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주류보다는 비주류의 길을 기꺼워하고, 타성을 쫓기보다는 차라리 창조적인 진화를 선택하는 사람. 타인이 닦아놓은 길을 따르기보다는 스스로 길을 내는 사람. 그 대가인 외로움과 고난과 위험을 삶의 안주로 삼을 줄 아는 사람. 육신의 고달픔을 택할지언정 영혼은 결코 꺾이지 않는 사람…… 나는 늘 그들의 삶 앞에 머리를 숙이게 됩니다.

 

이토록 정교한 언어체계와 교통통신수단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우리의 세상은 점점 더 작은 섬들로 나뉜 채 고립되어가고 있습니다. 사람의 숲은 날이 가면 갈수록 점점 더 단절과 불통과 기만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정치판은 정치판대로 불통인 세월을 잇고 있고, 부자는 빈자와 소통할 수 있는 언어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도시는 시골과 이어지지 못하고 있고, 마을은 마을과 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현관 모니터로 밖을 내다볼 수 있는 편리한 아파트가 많이 지어지면서도 이웃에 사는 이의 형편과 안부를 알지 못합니다. 고객을 대하는 친절 교육은 많아져 세련된 용모와 말씨는 넘쳐나는데 마음까지 녹이는 따스함은 사라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도처가 불통인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오로지 자신들의 영역에서만 이루어지는 소통은 마치 식물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자가수분과 같습니다. 자가수분이 유전적 다양성을 잃게 한다는 사실은 누구나 잘 알 것입니다. 유전적 다양성을 잃은 숲은 위험합니다. 어떤 변화나 위기가 찾아왔을 때 숲 전체가 한꺼번에 위기에 빠져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연에서는 한 종의 번영이 다른 종의 번영에 닿아 있고, 누군가의 멸망은 수많은 다른 누군가의 멸망으로 이어집니다. 자연은 서로 묶여 있습니다. 사람의 번영과 쇠락도 그와 다르지 않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이건, 사회건 성숙한다는 것은 소통의 그릇이 커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오색딱따구리의 자식 사랑은 이 시대의 우리와는 다른 모습도 지니고 있습니다. 즉 그들은 자식에게 홀로서기를 가르칩니다. 그것도 엄격하게. 그들은 새끼가 새로운 세상과 마주할 수 있도록 냉정하게 이별을 준비합니다. 둥지 밖의 세상을 보여주고 심지어는 더 이상 먹이를 주지 않음으로써 새끼 스스로 둥지를 떠나게 합니다. 결국 새끼가 홀로 삶을 개척해야 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초목들의 자식 자랑도 그러합니다. 그들도 모두 자식을 더 멀리 떠나보내기 위해 부단히 애를 씁니다.

 

나는 이제 나답게 살 것이다. 나답게 산다는 것은 어떤 삶인가? 그것은 돈이나 출세 때문에 비굴해짐이 없는, 자존과 자립으로 가득한 삶. 나의 편리를 도모하고자 타인의 이익을 빼앗지 않는, 죄짓지 않는 삶. 숨 막히는 도심에 갇힌, 자연에 대한 그리움을 마음 놓고 채울 수 있는 고삐 풀린 삶. 모색하고 싶으면 싶은 대로, 그만두고 싶으면 싶은 대로, 그렇게 가슴이 시키는 대로 창조의 자유를 벅차게 누리는 삶. 그리하여, 마침내 마음이 두어 뼘 더 자유롭고 평화로워지는 삶. 이 모든 것으로 조금 더 아름다운 세상을 이루는 데 기여할 수 있는 삶. 내가 나답게 산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삶이다. 내가 내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삶이다.

 

이곳 오두막에서 지내는 나의 하루는 철저히 해의 길이를 따릅니다. 해가 뜨면 하루의 삶이 열리고 해가 지면 하루의 삶이 닫힙니다. 그것은 마치 나무들의 하루와 같습니다. 낮은 노동과 창조의 시간이고 밤은 휴식의 시간입니다.

날이 밝으면 깨어나 숲과 들을 둘러보고 끼니를 먹는 것으로 하루를 엽니다. 낮이면 곡식을 돌보거나 집을 고치거나 정리할 곳에 손길을 줍니다. 숲 속을 거닐며 수많은 생명들을 만나고 살피고 생각하고 기록하는 일도 중요한 일과입니다. 때로 땔감을 줍고 장작을 패는 일도 중요합니다. 이는, 궂은 날과 추운 날에 대한 대비이기도 하고 운동이기도 합니다. 약간의 시간을 떼어 읽고 쓰는 작업도 지속합니다.

 

자연에 오기 전에 나 또한 비슷한 도시인이었습니다. 내게도 도시는 도무지 휴식을 모르게 하는 공간이었습니다. 빈한하면 빈한한 대로 고달프고, 풍요로우면 풍요로운 대로 고달프기 쉬운 곳이 그곳이었습니다. 오늘날 도시에서 우리의 삶은 쉼표를 만들기가 참 어렵습니다.

 

해가 지면 거의 모든 나무들이 노동을 닫고 휴식에 들어갑니다. 팽팽하게 끌어올렸던 물줄기의 행진을 풀어 내리고 꼿꼿하게 세웠던 잎의 긴장도 편안한 이완으로 빠져듭니다. 그들은 자신의 가지에 새를 재우며 별도 만나고 달도 만납니다. 잎을 접는 자귀나무와 회화나무는 휴식에 드는 모든 나무들의 모습을 매우 극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일 뿐입니다. 날이 어두워지거나 비가 오는 날, 소나무의 잎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소나무도 잎을 가지런히 접고 휴식에 들어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 종의 새가 사라졌다는 것은 이미 30여 종의 곤충이 사라졌다는 의미입니다. 소멸은 소멸을 낳고 그 소멸은 다시 더 빠른 소멸을 낳습니다. 우리 인간이 오로지 인간의 편리와 안전과 행복만을 욕망하는, 우리 인간이 오로지 인간의 편리와 안전과 행복만을 욕망하는, 이대로의 탐욕을 유지한다면 더 이상 희망은 없어 보입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소멸의 법칙은 지구상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닌 우리마저도 소멸에 이르게 할 것입니다.

 

나무들이 낙엽을 만드는 것은 더 깊은 안식에 드는 의식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축재의 방식이기도 합니다. 낙엽은 숲의 모든 식물들이 생장에 쓰고 남은 잉여가치입니다. 질소와 인산과 칼륨처럼 소중한 영양소는 몸속으로 다시 회수하여 저장하고 탄소를 중심으로 하는 부차적인 양분들은 잉여가치로 잎에 남겨둡니다. 식물들은 그것을 숲 바닥에 떨어뜨림으로써 다시 생장의 계절에 쓸 거름을 만듭니다. 수많은 미생물과 지렁이와 곤충과 이끼 등 다른 생명들이 그들을 덮고 매만지며 살아갈 것이고, 결국에는 이를 흙으로 되돌려놓습니다. 궁극적으로 그들은 흙 속으로 돌아간 양분을 흡수하며 해를 잇는 자신의 욕망을 펼칩니다.

 

천지에 순환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순환의 원리와 질서 속에서만 모든 생명의 삶이 부양되고 존속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별에만 이토록 특별한 순환의 질서가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영국의 저명한 과학자이자 발명가이자 저술가인 제임스 러브록은 이 질문에 대해 지구가 살아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러브록은 자신의 유명한 저서 가이아: 살아 있는 생명체로서의 지구에서 지구를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로서 그 위에 살고 있는 생물들이 최적의 생존 조건을 유지하도록 항상 스스로 조정하며 스스로 변화하는 별이라고 보았습니다. 달리 말해, 지구는 스스로 자신을 조절할 줄 아는 거대한 유기체와 같으며, 따라서 이 별을 살아 있는 지구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 지구가 그 자체로서 하나의 거대 생태계인 셈입니다. 요컨대 러브록은 이 가이아 가설을 통해 지구가 스스로 살아 있어 생명이 이어질 수 있는 평형을 이룬다고 주장합니다.

사람과 나무와 풀의 죽음을 만날 때마다 나는 신이 삶의 끝자락에 죽음을 배치한 이유가 무엇일까를 생각합니다. 죽음은 순환이 아닌 삶의 종식을 위해 마련된 절차일까?

내 생각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오히려 잘 살라고 마련된 장치입니다. 신이 한 생명에게 두 번의 삶을 주지 않은 까닭은 살아 있는 시간에 충실하여 후회가 없게 하라는 뜻이겠지요.

초목이 초목답게 열심히 살아 잎을 내고 꽃을 피우고 산소를 만들고 비를 만들고 수많은 생명들이 기댈 공간을 만들어내면서 후회를 남기지 않듯이, 사람은 사람답게 살아 그것으로 후회가 없어야 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것이 살아 있음에 부여한 신의 소명입니다.

죽음 또한 그러합니다. 모든 죽음에는 새로운 소명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생명은 죽어서는 이 별의 생명을 부양하는 물질로 순환하며 새로운 소명을 수행해야 합니다. 초목이 그 시신을 통해 이끼를 키우고 애벌레를 키우고 새를 키우고, 마침내 흙으로 되돌아가서 산 생명의 영양분이 되듯이 우리 사람의 주검도 미련없는 흙이 되어 이 푸른 별의 생명을 부양해야 합니다.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만 죽지 않고는 새로운 생명이 태어날 수 없습니다. 순환이 멈춘 자리에서 생명도 멈춥니다. 지구가 푸른빛의 별일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떠나야 합니다. 자연의 순환 원리가 그러하므로. 언젠가 우리는 모두 되돌아가야 합니다. 사는 동안 그 순간을 한 번쯤 미리 생각해보고 준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떠나는 내가 남겨진 이들에게 남겨 아름다운 것이 무엇일까?

또한 남겨 추한 것이 무엇일까?

떠나면서까지 가난한 영혼을 움켜쥐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죽어가는 나무의 모습은 처연하지 않습니다. 나의 눈에 그것은 오히려 담담하고 더러 풍성하기까지 합니다. 나무는 죽으면서 다른 생물들에게 수많은 혜택을 베푸는 것으로 자신의 죽음을 풍성하게 합니다. 죽어 소멸해가는 나무들의 몸은 다른 생명들을 위해 베푸는 마지막 잔치와도 같습니다.

 

법정 스님은 아름다운 마무리라는 책에서 삶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삶은 소유가 아니라 순간순간의 있음이다. 영원한 것은 없다. 모두가 한때일 뿐. 그 한때를 최선을 다해 최대한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 삶은 놀라운 신비요, 아름다움이다. 그 순간순간이 아름다운 마무리이자 새로운 시작이어야 한다.”

 

태어나서 죽기까지, 그 살아 있음을 삶이라 부릅니다. 삶에 대해서는 수없이 고민하고 설계하면서도 사람들은 삶의 마지막에 대해서는 별로 고민하지 않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자기 삶의 마지막을 떠올려보지 못한 채, 더 빠른 성장과 더 많은 결실에만 몰두하며 살아갑니다. 때로 삶은 고해와 같다면서도 정작 그 고해를 건너는 마지막 단계에 대해서는 두려워합니다.

 

죽음을 자기 자신의 완전한 소멸이거나 알지 못하는 영역으로의 이동이라고 생각하는 이에게 죽음은 두려움입니다. 하지만 스스로 마땅한 길을 걸어 삶의 끝에 도착한 이에게 삶은 결코 미련으로 남지 않을 것이며 죽음 또한 두려움의 대상이 아닐 것입니다.

내 오두막 옆에 잠든 어르신이 보여준 것처럼 죽음은, 우리가 빚을 졌던 이 별로 고요히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새로운 생명들을 위해 흙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이쪽의 삶이 닫히고 저쪽의 새로운 소임이 열립니다. 두려워할 것은 오히려 살고 있으되 살아 있음에 철저하지 못하고, 죽음의 때에 이르러서도 그 죽음에 철저하지 못한 우리의 삶입니다. 정말 두려워해야 할 일은 신이 우리에게 부여한 삶과 죽음의 기회를 헛되게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