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
피스캠프
지금은 '베트남 전쟁' 세미나 중...
치앙마이에서 아이들은 각자 베트남 전쟁과 관련된 주제를 하나씩 맡았는데요.
로드 기간 동안 스스로 공부하고 조사하고, 전쟁 박물관도 다녀오고 많은 고민을 하며...
아이들이 자신의 안에서 이끌어낸 생각들입니다
짜자잔~~
--------------------------------------------------------------------------------------------------------------
* 제이크의 주제 : '베트남 전쟁이란?'-
베트남 전쟁이란? - Jake
베트남전쟁이란, 북베트남이 독립하기 위해 프랑스와 싸운 제1차 전쟁과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이 싸운 제2차 전쟁이 있다.
19세기부터 프랑스의 지배를 받던 베트남은 1차 세계대전 이후로 베트남 안에서 프랑스 세력을 쫒아내고 공산국가를 만들기 위한 인도차이나공산당이 1930년에 만들어졌다.
우리나라 광복절이 있는 1945년 8월에 일본이 망하면서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난 베트남은 ‘베트민’ 이라는 독립연맹을 만들어 온 나라 안에서 반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를 ‘8월 혁명’ 이라 하는데, 인도차이나공산당을 중심으로 일어난 반란이지만 서로 정치적으로 생각이 다른 사람들끼리 한편이 되어서 일어난 해방운동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이후 베트남해방운동은 성공적으로 일어났고 그해 9월 2일 호치민이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선포하였다.
베트민은 공산주의자이지만 동시에 프랑스를 싫어하고 독립하고 싶어하는 민주주의자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같은 편이 되어 주었다.
하지만 프랑스는 이들을 좋게 봐주지 않았다.
그러던 도중, 1946년이 끝나갈 무렵, 하이퐁 항구에서 프랑스와 베트남이 직접적으로 싸우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것으로 시작된 제1차 베트남전쟁은 9년동안 계속되었고, 1954년 프랑스가 패배했다.
프랑스가 진 이유는 베트남에서 실시한 토지개혁이라는 것 때문에 자신의 땅을 가지게 된 농민들의 절대적인 도움을 받고 그것으로 군사력이 막강해졌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미국으로부터 도움을 받아 싸웠지만, 계속되는 게릴라전을 감당하지 못한 프랑스는 결국 패배한다.
이로써 제1차 베트남전쟁은 베트민의 승리로 끝을 내린다.
전쟁 이후 중국과 소련은 공산국가 베트남을 기대하며 베트민에게 위도 17도를 기준으로 국경을 나누라고 요구했고, 베트남은 이를 따라 북과 남으로 나뉘어 통치되었다.
남베트남에서는 미국의 도움을 받아 응오 딘 디엠을 대통령으로 하는 베트남공화국이 건국되었다.
디엠정권은 토지개혁을 통해 땅을 가지게 된 농민에게서 다시 땅을 빼앗고 이것에 반대하는 세력을 눌렀다.
겉으로는 안정적이었지만 점점 정권의 약한 점이 드러나게 되었다.
디엠정권은 제네바협정에서 결정된 통일선거를 거부하고 미국의 도움을 받아 남베트남 노동당에게 군사적 공격을 시작했다.
제2차 베트남전쟁은 남베트남 노동당을 중심으로 응오 딘 디엠 정권에 맞서고, 베트남의 통일을 위해 제네바협정에서 약속한 통일선거를 요구하면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디엠정권의 탄압이 심해지자 남베트남 내에서 반란이 일어나 점점 퍼져나갔고, 1960년에 ‘베트남민족유전선’이 만들어졌다.
이들은 디엠정권에 대항하면서 군사활동을 벌였고, 결국 다음해 11월에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응오 딘 디엠 대통령이 암살되면서 남베트남은 점점 혼란스러워졌다.
미국은 베트남을 잃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지나는 ‘호치민트레일’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1964년 미국은 통킹만 사건을 통해 본격적으로 베트남전쟁에 참가했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을 공산주의자들이 일으킨 전쟁이고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공산주의가 퍼져나가야 한다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케네디 대통령의 결정으로 남베트남에 군사를 보내게 된다.
미국은 북베트남에게 엄청난 양의 폭탄을 떨어트려 전투력을 낮추려 했지만 오히려 북베트남이 전쟁에 본격적으로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북베트남은 사이공 등 전국 주요 도시와 미국 군사 주요시설을 공격했다.
그 후 몇 년 동안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고 1972년 여름이 되어서야 그만 싸우기로 했다.
그 후 남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도움이 많이 줄어들면서 1975년 갑자기 북베트남이 총 공격을 벌였고 그 해 4월 31일 사이공이 무너지면서 남베트남이 항복하게 되었고, 제 2차 베트남 전쟁이 마침내 끝을 내리게 된다.
세미나 준비를 하면서 느낀 점 -
식상한 말이지만 처음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베트남에 와서부터 세미나 준비를 하면서 점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 후 박물관을 다녀오고 나서 내가 모르고 있던 베트남 전쟁이 2차 세계대전과 규모가 비슷하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전시되어 있는 사진과 도표를 보면서 또 충격을 받고 ‘전쟁은 왜 할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세미나를 준비하면서 별로 힘들지는 않았지만 성과는 컸던 것 같다.
학교 사회 시간에 배우는 것과 비슷한 내용인데 머릿속에 들어오는 건 이게 훨씬 컸다.
역시 뭐든 하고 싶어서 하면 흥미도 생기고 머리에 잘 들어오는 것 같다.
약간 뿌듯하다
전쟁에 대한 나의 생각 -
정말이지 전쟁은 없어져야 한다.
군사들도 싸우고 싶어 싸우는 게 아닐 거고, 죄없는 민간인 들이 너무 많이 죽는다.
그런데 전쟁을 일으킨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뒤에서 구경만 한다.
너무 꼴보기 싫고 전쟁 후 피해는 더 크다. 방사능, 고엽제처럼 기형아들이 태어나고 인간이 살아가던 땅과 자연이 없어진다.
더 많은 피해들이 있지만 이런 걸로만 봐도 전쟁은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전쟁이 없어졌으면 좋겠다.
---------------------------------------------------------------------------------------------------------------
* 제임스의 주제 : '베트남 전쟁 희생자, 사망자 수'
미군 - 55만 3천여 명의 군사를 보냈다.
그중 58169명이 죽었고, 약 30만 4천명이 다쳤다.
한국군 - 4687명이 죽었고, 약 1만 6천여 명이 다쳤다.
베트남 민간인 - 약 140만 명이 죽었고, 70만 명 부상으로 베트남 전체의 민간인도 200만 명 이상이 죽거나 다쳤다.
북베트남군 - 약 13만 명이 죽음. 부상자(?).
남베트남군 - 약 11만 명이 죽었고, 약 117만 명이 다쳤다.
총 약 150 ~ 250만 명이 사망했고, 6,500만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베트남 전쟁 세미나 -
너무 힘들다.
여러 자료를 찾으면 거의 다 다른 답만 나오고, 어떤 건 아예 자료가 안 나오는 것도 있다.
어떻게 보면 내가 제일 쉬운 주제 같은데 너무 어렵다.
자료의 답이 다 다른데 그중에서 믿을만한 자료가 뭔지 모르겠다.
그래서 지금 미군, 베트남인, 한국군에 대해서 밖에 조사하지 못했다.
그것도 확실하지 않은 정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어제 전쟁 박물관에 가서도 건진 게 하나밖에 없다.
그런데 건진 것도 이미 조사한 것이어서 사실, 말하자면 건진 게 없다.
빨리 세미나가 끝났으면 좋겠다.
전쟁에 대한 나의 생각 -
도대체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뜻이 맞지 않다고 전쟁을 하지 않는 것은 이해가 안 된다.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정녕 전쟁밖에 없단 말인가.......
그리고 전쟁을 할 것이면 그 나라끼리만 할 것이지, 왜 다른 나라도 껴가지고
더 많은 사망자와, 부상자를 만드는지 모르겠다.
어제 베트남 전쟁박물관에서 죽은 사람과 기형아들을 봤는데 진짜 끔찍했다.
전쟁은 뭘까?
언젠가는 평화가 오겠지..........
-----------------------------------------------------------------------------------------
* 스티브의 주제 : '베트남 전쟁의 참전 국가와 파병군의 수'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국가들은
남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미국, 한국, 프랑스이며
참전한 군인의 수는 최소805,000명 이상이며 최대1,400,000명으로 추정된다.
전투 병력을 파견한 대한민국 군인은 총15,000여 명 중 5,099명이 전투 중 사망했다.
미국은 파견한 군사 총55만 3천여 명 중 5만 8천여 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됐다.
남베트남군인은 최소 25만 명 이상이 사망했으며
NLF군도 정확하지는 않지만 1백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고 추측하고 있다.
(NLF. natinal liberation front. 민족해방전선을 뜻함)
그래서 총사망자수는 584,462 ~1,672,462명이고 총생존자수는 최소 604,200명 이상일 것으로 추정된다.
- 세미나를 준비하면서 느낀 점
어제 박물관에 다녀왔는데 전쟁 중 찍은 사진이 정말 잔인했다.
게임 중 화면에는 총을 쏴서 상대방을 죽이면 상대방이 그냥 쓰러지는데 진짜 전쟁에서는 총에 맞으면
팔, 다리, 머리가 잘려나간다고 생각하니 정말 끔찍했다.
- 다음은 전쟁에 대한 나의 생각이다.
만약 전쟁이 또 다시 일어나서 베트남 전쟁 때처럼 잔인한 일이 또다시 일어난다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베트남전쟁처럼 자유를 위한 정당한 전쟁이라도 피와 살이 튀는
전쟁이기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
* 테디의 주제 : '통킹 만 사건의 진실은?'
통킹만 사건은 1964년 8월 2일 베트남 북동부 통킹만에서 미군과 북베트남군이 군사적 충돌을 한 일이다.
통킹만 공해상에서 순찰을 돌고 있던 매독스함이 북베트남 어뢰정의 공격을 받았고, 이틀 뒤인 8월 4일에는 조이터너 함이 북베트남군의 공격을 받는 등 총 2차례에 걸쳐 일어난 사건이다.
교전의 피해는 북베트남 측 어뢰정 3대에 피해를 입었고 사망 4명, 부상 6명이고, 미군은 구축함 1척과 항공기 1대에 경미한 피해를 입었다.
사건 당시 미국측의 주장은 북베트남이 매독스 함에 선제공격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북베트남 측의 주장은 매독스 함이 북베트남의 영해 내에서 북베트남의 어뢰정을 선제공격했다고 한다.
사실의 여부를 떠나, 이 통킹 만 사건으로 인해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 본격적인 개입을 하기 시작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린든 존슨은 통킹만 결의안을 의회에 냈는데, 주요내용은 ‘미군에 대한 어떠한 무장공격도 격퇴시키고 더 이상의 침략을 방지하기위해 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이 취하는 모든 조치를 승인하고 지지한다.’라는 내용이다.
8월 7일 미 의회는 하원(414:0), 상원(88:2) 모두 이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드디어 미국의 본격적 참전이 시작된 것이다.
통킹만 사건이 일어난 배경
통킹만 사건이 일어나기 전의 상황은 남북은 독자적인 정부를 수립한 채 분단되어 있었다.
남베트남 정부의 비리와 부패에다가 초대대통령이었던 응오딘 디엠이 프랑스 식민지정부의 관료였던 점에서 남베트남 국민의 지지를 별로 받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는 철저한 반공주의자여서 반대파 숙청도 많이 했는데, 숙청의 대상이 공산주의자만이 아닌 모든 반대파에 해당하는 것이어서 민심의 이반을 일으켰다.
그런 상황에서 남베트남에서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외세를 밀어내자고 외치는 남베트남민족자유전선이 결성되고 그들은 남베트남정부에 게릴라활동을 하며 군사적 활동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쿠데타로 인해 디엠 대통령이 암살되며 남베트남은 혼란으로 치닫게 된다.
미국은 이러다 공산세력에 남베트남이 넘어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하던 차였다.
숨겨진 뒷이야기.
통킹만 사건이 발단이 되어 전쟁이 한창이던 1971년 6월 13일. 충격적인 사실이 뉴욕타임즈를 통해 보도된다.
‘펜타곤페이퍼로 본 미국의 군사개입 확대과정 30년’이란 제목의 기사를 뉴욕타임즈가 보도한 것은 펜타곤 페이퍼라는 문서에 기초하였는데,
이 문서는 1945년부터 1967년까지 미국 정부가 정치적, 군사적으로 베트남전쟁에 개입한 역사를 미국국방부(펜타곤)가 작성한 1급 기밀문서이다.
이 문서에는 전쟁의 원인인 통킹만 사건에 대한 정보가 알려진 사실과는 정반대의 내용이 담겨있어서 사람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통킹만 사건이 북베트남의 도발이 아니라 미국이 전쟁을 일으킬 명분을 쌓으려고 조작했다는 내용이었는데 이 기사는 전 세계로 퍼져나가 전쟁반대운동으로 이어졌고, 미군이 철수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 문서 이외에도 당시 국방부 장관이었던 로버트 맥나마라도 1995년 회고록에서 미국의 자작극이었음을 고백했다.
그렇다면 미국은 왜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면서까지 전쟁을 일으키려 했는가.
당시 베트남은 우리나라처럼 남북으로 분단되어 있던 때였다.
남은 자본주의 북은 공산주의로 나뉘어져 있었다.
하지만 남베트남의 상황이 정부의 부패와 반란으로 인해 혼란스러워지자 자칫하면 남베트남이 공산세력의 손에 넘어갈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주변국인 라오스와 캄보디아도 두 세력으로 인해 혼란스러운 시기가 계속 되었는데, 남베트남이 넘어가게 되면 라오스와 캄보디아도 자연히 넘어 갈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군사개입이 절실한 상황에서 정당한 이유가 필요했기에 통킹만 사건을 조작한 것이다.
세미나를 준비하며 느꼈던 점.
미국이 전쟁의 이유로 내세웠던 통킹 만 사건이 조작이 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물론 전쟁이 일어나고 한참 뒤이다.
그 사이에 전쟁으로 인해 베트남전역은 피와 상처로 빨갛게 물든 지 오래였다.
공산당 간부건, 반공주의자이건, 베트콩이던, 민간인이건, 미군이건 간에 말이다.
셀 수도 없이 수많은 사람에게 죽음과 슬픔과 아픔과 분노 따위의 단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전쟁’이란 현실이 사실은 극소수의 이익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것은 전쟁의 승패를 떠나 특정 진영을 떠나 인간에 대한 조금의 생각이라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으면 이러한 판단을 적어도 자기 손으로는 내리지 못했으리라 생각이 된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일이 일어난 사실이 너무나 가슴이 아프다.
인류사를 보면 이익에 의해 싸우는 것이 참 많았고, 현재도 그렇고, 앞으로도 일어날 것 같지만, 이런 사건들을 보면서 그 사람들도 자신의 선택이 수백, 수천, 수만, 수십만, 수억의 목숨과 인생을 앗아갈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다시는 최악의 선택인 전쟁을 일으키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세상의 모든 어른들께 드리고 싶은 말이 있다.
어느 부모님이나 다 그렇겠지만 자식이 싸움하는 것을 원하는 부모님은 없을 것이다.
형제끼리 싸워도, 친구끼리 싸워도 말로 해결하라고 말씀해주신다.
나는 정말 그 말을 다시금 모든 어른들에게 해드리고 싶다.
그러면 이 세상에 전쟁은 없을 것이니 말이다.
전쟁에 대한 나의 생각.
전쟁박물관에 가보니 전쟁의 일부나마 사진으로 남았다.
그 사진을 보면서 무섭기도, 온몸을 감싸는 소름도, 고엽제 피해자들에 대한 미안함도 느껴졌다.
그리고 내가 전쟁의 당사자였다면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너무나 싫다.
눈 앞에 머리가 잘린 채 놓여 있고, 트럭에 매달아서 죽이고, 사지가 다 찢어진 채 죽어있고, 눈앞에 총알이 스쳐지지나가고, 집은 불에 타 온데간데없고, 가족들도 눈앞에서 군인의 손에 죽고 그 모습이 내 삶의 기억으로 남아있다면 정말 살고 싶지 않다.
사실 요즘도 우리나라부터 시작해서 전 세계 수많은 국가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있거나, 전쟁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은 많다.
하지만 한번 묻고 싶다.
저렇게 사진으로나마 남아있지 않나.
공산이건 자본이건 민주주의건 사화주의건 빨갱이건 파랭이건 이 땅이 니 땅이건 내 땅이건. 결과는 한 쪽의 승리가 아닌 서로에게 엄청난 상처만 남기는 것이다.
원하는 게 무엇이냐. 원하는 것이 정말 상처이고 아픔인가.
내게 “그럼 어쩔 건데!”라고 되물을 수 있다.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저건 아니지 않느냐.
전쟁은 장난이 아니다.
죽으면 10초 뒤 다시 살아나는 게임이 아니라는 것이다.
수많은 이에게 어떠한 말로도 설명이 부족한 그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으면 한다.
진심으로. 그리고 그 이전에 나또한 다른 이와 문제가 있으면 이기려는 마음이 아닌 서로를 이해하는 마음으로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실하게 느꼈다.
---------------------------------------------------------------------------------------------------------
* 브래드의 주제 : '호치민은 누구인가?'
호치민
본명: 응 웬 닷 탕
국적: 베트남
출생:사망:1890년5월19일~1969년9월3일
직업: 정치인. 혁명가
구 베트남민주공화국의 초대 대통령
출생지: 베트남 게친주
베르사유회의참석해서 베트남인민의 8항목의 요구를 제출하여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에도 계속 혁명운동을 하여 베트남의 독립시위를 주도해 베트남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정부 주석으로 취임했다.
어릴 적에는 응웬 싱콘이였고 그 외 가명과필명이 무려160여 개가 있다
발전된 서구의 신학문을 공부하기 위해서 프랑스로 증기선 견습요리사로 건너간다.
1914~1919년까지 영국 런던과 미국 뉴욕에서 하인,견습공 등의 밑바닥인생을 살아왔지만 세계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과 생각은 급속하게 성장하였다
1919년 세계1차 전쟁이 끝이 나고 파리에 정착하였다
이때 그의 이름은 아이 꾸옥이란 이름으로 식민지해방운동을 시작하였다.
1924년 모스크바의 코민테른 제5차대회에 출석 동방부 상임위원이 되었고 코민테른에서 약2년을 살면서 공산당 혁명사상을 공부하였다
1930년 코민테른에 의하여 권한을 받고 인도차이나공산당(베트남)을 창립하였다.
이때 그의 이름은 리 투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1931년 6월6일 홍콩의 영국경찰에게 체포되었다가 1933년에 석방되어 일단모스크바로 돌아갔다
1940년부터 중국 쿤밍에서 중국공산당 조직과 함께 활동하였으며 1941년 2월 베트남에 잠입하였다
1942년 중국 중경을 방문하였다가 프랑스와 일본의 스파이로 오해받아 중국국민당에 체포되었다.
1943년석방되었고 중국과 미국을 상대로 월맹이 임시과도정부임을 승인받았다.
1945년 8월 일본의 패전으로 태평양전쟁이 끝나자 호치민을 의장을 하는 민족해방위회가 결성되었다.
여기저기서 시위가 일어났으며 월맹은 베트남중부와 북부를 빠르게 차지하였다.
1945년 9월 2일 호찌민은 베트남민주공화국의 독립을 말하고 호찌민은 정부의 주석으로 취임하였다.
1946년 프랑스에 대한 전쟁을 직접 지휘하여 1954년에 프랑스를 상대로 승리하여 독립을 지켰다.
그러나 구소련과 중국의 간섭 때문에 완벽하지는 못했다.
베트남은 17도선을 경계로 남과 북이 떨어저 극도의 정치 불안에 빠지게 된다.
그러다 곧이어 남북 전쟁이 시작된다.
1969년 9월 2일 9시4 7분 주석 재임 중 심장병으로 돌아가셨다.
호찌민은 평생을 혼자 살았으며 어떠한 치장도 하지 않고 평번한 동네 아저씨차림이었다.
호찌민은 세계적으로 가장 오랜 기간 동안 게릴라전의 지도자로 프랑스와 미국을 모두 물리쳤다는 업적을 남겼다.
- 준비하면서 느낌 점
모르는 단어가 너무 많이 있었다.
베트남에 대해서 좀 더 많이 알게 된 것 같다.
- 전쟁에 대한 나의 생각
전쟁은 하면 남는 것도 없고 좋은 것 도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전쟁은 별로 좋은 것 같지 않다
- 베트남 화폐인 '동'에 새겨져 있는 호치민의 얼굴을 확인하는 제임스'
-----------------------------------------------------------------------------------------------------------
* 스완의 주제 : '베트남 양민 학살이란?'
베트남 양민 학살
베트남 양민 학살은 미군이 적대행위를 하지 않은 아무 죄없는 베트남인을 죽이는가 하면 추행도 망설임조차 없이 저질렀고,
맨정신의 인간이라고 해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짓을 하였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밀라이 학살이 있다.
미군 찰리중대 윌리엄 캘리중위와 병사들은 마을 주민이 적대행위를 하지 않았는데도 움직이는 물체만 보면 총을 쏘았다.
포로 중 대부분이 여자, 노인, 어린 아이였고 남자들은 교전 중에 이미 살해 되었다.
포로 수색 과정에서 추행 고문이 있었다.
여자몸을 전리품으로 자르고 임산부의 배를 자르는 등 잔인한 짓을 저질렀다.
학살된 민간인은 최소 347명 최대는 504명으로 추정됐고 비공식 자료에는 임산부 17명, 6세 미만 어린이는 173명이 죽었다.
미군은 현장을 철저히 파괴하였다.
결국, 밀라이 사건은 베트남 제대병과 프리랜서 기자에 의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밀라이 사건으로 유죄판결을 받은 것은 윌리엄 캘리가 유일했고 그 외 장군, 장교, 병사들은 무죄판결을 받게 되었다.
평범한 생활을 하던 윌리엄 캘리는 결국 2009년 8월 40년 만에 사죄하였다.
세미나를 준비하면서 느낀 점 -
전쟁 박물관, 독립궁, 노트르담 성당, 우체국에서 인증샷을 다 찍고 마지막으로 호치민 동상에 사진을 찍으러 가기 위해 지도에 표시해놓은 것을 보고 같는데 위치가 틀려서 약간 헤맨 것, 너무 덥고 갈증이 많이 나서 힘들었다.
베트남 전쟁 세미나 준비를 하면서 몰랐던 것들을 알게 되어서 좋았고, 조사를 하면서 완성이 됐다고 조사를 끝냈다고 생각하다가 완벽히 끝나지 않고 정확히 머리에 들어오지 않아서 여러 번 다시 정리하게 되니까 끝이 없고 막막해서 멘붕이 찾아왔다.
결국에 마무리를 지어서 무거운 짐을 조금 덜게 된 것 같다.
전쟁에 대한 나의 생각 -
나는 전쟁에 대한 이야기, 사진등을 보면서 전쟁의 끝은 비참하고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전쟁을 하여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게 만들기 때문이다.
전쟁을 하는 기간보다 더 많은 기간이 평화를 만드는 데에, 상처를 치유하는 데에 소모된다.
전쟁을 하는 것보다 서로 타협하면서 차근 차근 풀어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쟁은 사람에게는 독 같은 존재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에게 총을 쏘아서 피해자를 만들 듯이 독이 사람의 몸에 번져 시간이 지나면서 점 점 죽게 만들 듯이 전쟁을 하면서 더 크게 번지게 된다.
전쟁을 하기보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 샌디의 주제 : '베트남 전쟁에 사용된 고엽제는 무엇이며, 그 피해는?'
고엽제는 나무를 말라 죽이기 위해 살포한 잡초를 없애는 약을 말하며, 미군이 베트남 전쟁 당시 사용하였습니다.
베트남 전쟁에서 살포된 고엽제는 다이옥신이라는 화학적 순수하지 않은 물질이 있는데, 이것은 청산가리의 1만배 비소라는 독성이 있는 화학물질의 3000배에 이르는 독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독소는 분해되지 않고, 몸의 내부에 쌓여 10년 24년이 지난 후에도 각종 암과 신경계 손상을 일으키며, 기형을 생기게 하고 독성이 유전되어 2세에게도 피해를 끼칩니다.
고엽제에 노출된 많은 사람들이 질병으로 고생받고 있으며 고엽제를 생산하는 기업과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벌이고 있습니다.
고엽제가 개발되고 난 직후만 해도 고엽제의 해악성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고엽제는 동물실험에서 기형이 되게하는 성질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인간에 대한 영향은 불분명하다는 부정 의견이 있었지만, 인간에 대해서는 동물과 같은 실험을 할 수 없기 때문에 확인이 불가능 했습니다.
베트남 전쟁 때 사용된 고여제는 많은 종류의 고엽제보다, 독성이 매우 강해 동물실험으로 최고 기형성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고엽제의 살포에 대해 명목상으로는 말라리아를 생기게 하는 모기나 거머리를 없애기 위해 살포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은신한 삼림을 말라죽게 하고, 농사땅을 파괴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고엽제는 1961년부터 1975년에 걸쳐 사이공 주변이나 떠이닌 성이나 박리에우 성에 대량으로 살포되었다.
미국 재향군인국의 자료에 확인 가능햔 양으로 83,600,000 리더의 고엽제가 살포되었습니다.
콜롬비아 대학의 진스테르만의 조사에서는 400만 명의 베트남인이 고엽제에 노출되었다고 폭로하였습니다.
그리고, 미국 과학 진흥 협회 aaas에서, 하버드 대학의 매튜 메세루슨, 바우만 등이 살포 지역의 출산 이상의 급증에 대한 보고가 미뤄졌습니다.
그 보고서는 1959년부터 1968년 기형아 출산, 4002건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기형아 출산률이 사이공에서 1000명 중 26명, 집중 살포지역인 떠이닌 성에서는 1000명 가운데 64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한국의 군인 중에서도 상당수가 두통, 현기증, 가슴앓이 등 이상을 보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고엽제가 다이옥신의 일종인 TCDD를 포함하고 있다는 학계 보고가 처음 나온 것이 1969년이었고, 독성학 전문 연구자들 사이에서 TCDD의 치명적 독성이 널리 알려진 것은 1979년의 일이다.
이에 따라 미 환경청 EPA는 1967년에 고엽제의 사용을 금지시켰습니다.
1967년 고엽제 살포현장..
1967년에 한국의 기자가 고엽제 살포현장을 찾았습니다.
북위 17도 남북 베트남 사이에 설정된 폭 6마일 비무장지대에서 미군이 고엽제를 뿌리는 공사를 취재한 것입니다.
거기에서는 불도저와 트랙터로 정글을 밀어버리고 다시 싹이나지 않게 고엽제를 뿌리고 있었습니다.
‘죽음의 경계선’을 긋는 이 공산느 그러니까 베트콩 침투를 최종 저지하는 최후 방어선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공사 담당 미군 장교는 불도저로 훑고 트랙터로 땅을 고르고 흙속에 깊이 박힌 식물 뿌리를 뽑아내도 불과 몇 달 만에 정글이 다시 생기니까 고엽제를 아주 충분히 뿌려 초토 작전을 끝낸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또, ‘죽음의 경계선’ 안에 든 민가는 모조리 불태우고 주민을 전원 이주시킨다는 것입니다.
기자가 양민의 심정이 어떨 것이냐고 묻자 그는 우리 집 앞뜰을 누가 닦아버리고 약을 친다면 가만히 있겠소? 라면서도 전쟁이니 어쩔 수 없지 라고 말했습니다.
육상부대가 공사를 직접 하기도 했지만, 미군은 공중살포를 훨씬 선호했습니다.
지상 작업을 베트콩에 노출돼 공격받기 쉬웠기 때문입니다.
61년 11월부터 시작해 10년동안 미군은 베트남의 산악과 농경지 2만4천 평방 KM에 고엽제를 살포했습니다.
이는 베트남 경작지의 10% 전 삼림의 30%에 달하는 면적이었습니다.
다국적 화학 회사인 다우 케미컬 몬산토, 발레로 에너지 등에서 제작해 미군에 납품하였습니다.
전쟁이 더욱 격화된 60년도 후반에는 물량이 워낙 달려 미국은 뉴질랜드 등에 고엽제 생산 판매를 맡기기도 했습니다.
미국은 고엽제 살포 작전이 베트콩 게릴라의 은신처를 노출시키고 그들의 농사 땅을 말라죽게 하여 식량 보급을 끊으려 했을 뿐, 인체에 해로운 무기로서 쓴 것은 아니라고 변명했다.
전쟁이 끝난지 한참 지나 스웨덴 스톡홀름의 국제 평화 연구소는 베트남에서의 고엽제 살포 상황을 수치로 밝혔습니다.
고엽작전 기간 중 베트남에는 9,100만 KG의 고엽제가 살포되었습니다.
베트남의 산림과 논 170만 헥타르가 수난을 당했고 그 중 57만 8천 헥타르에는 두 번 이상 뿌려졌습니다.
이는 1헥타르에 42KG의 고엽제를 뿌린 것과 같습니다.
물론 이 수치는 자연 피해를 계량한 것일뿐입니다.
인간에 직접 미친 피해는 70년데 후반에 들어 확연히 나타났습니다.
그건 그야말로 암울한, 정말로 대책이 없는 공포였습니다.
86년 도쿄에서 모습을 보인 베트남전 기형아의 모습을 보면 세계는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저도 경악을 금치 못했고요.
전쟁에 대한 나의 생각
나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전쟁을 왜 하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전쟁을 하면서 아무 죄도 없는 일반 사람까지 죽이다니 너무하다.
전쟁은 잔인하고, 참혹하다.
그리고, 내 생각에는 전쟁이 각 나라의 의견차이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라고 본다.
베트남 전쟁 역시, 남베트남과 북베트남의 의견차이로 일어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꼭 그것을 전쟁으로 해결 했어야 됬나 생각이 든다.
이제 이런 참혹한 일이 일어나지 않고, 전쟁도 없어지면 좋겠다.
그리고, 온 세상에 평화가 있었으면 좋겠다.
PEACE
느꼈던 점.
나는 이번 세미나로 인해 베트남 전쟁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었다.
베트남 전쟁 박물관에 가서 사진들을 보니 2번째 가는데도 무서웠고 경악했고 몇몇 사진들은 차마 보지 못했다.
베트남 전쟁의 잔인함을 또다시 느끼게 되었고 특히 내가 맡은 고엽제의 심각성을 더욱더 알게 되었고 왜 그런 짓을 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베트남 전쟁 박물관은 꼭 가봐야 할 곳 같다.
그리고, 나는 베트남 전쟁 박물관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고엽제 살포에 대한 나의 생각은 미국이 굳이 고엽제를 쓰면서 까지 전쟁을 할 필요가 있었나 생각이 든다.
베트남 전쟁에 대해 알아가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참혹한 현실을 보니 너무 슬프다.
세계에 평화가 오기를...
PEACE
세미나 중 가장 아이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던 샌디의 고엽제 발표
--------------------------------------------------------------------------------------------------------
* 조와 민의 주제 : '베트남 전쟁에 대한 인터뷰'
독립궁에서 인터뷰를 한 민과 조^^!
(질문)1.
베트남전쟁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답변)- 북베트남과 미국, 남베트남 사이에 일어난 전쟁인 것 같습니다.
(질문)2.
베트남 제1차 전쟁은 어느 나라끼리 전쟁을 하신지 아시나요?
(답변)-음.. 저가 생각하기로는 북베트남과 프랑스가 전쟁을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질문)3.
베트남은 어느 나라에 식민지 지배를 받은지 아시나요?
(답변)-100년 동안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질문)4.
게릴라 전쟁을 아시나요?
(답변)-그건.. 잘 모르겠네요..
(질문)5.
베트남전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답변)- 베트남전쟁 당시 태어나지 않아 답변하기가 어렵네요..
이 질문은 전쟁 당시 있었던 분께 물어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질문)6.
전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답변)- 전쟁은 매우좋지 않다고 생각하고, 알다시피 우리는 모두 전쟁을 싫어 합니다, 모든나라와 평화를 원합니다.
(질문)7.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인도 참전 했었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답변)- 한국군인들이 왔었는데 그당시에 한국군인은 미국을 위해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원하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질문)8.
베트남전쟁에 대해 학생들은 배우나요?
(답변)- 학생들은 역사에 대해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베트남 전쟁과 미국 그리고 프랑스 식민지 시기에 대해 모두 배웁니다.
<조가 느낀 점>
저는 독립궁을 갔다와서 많이 힘들었지만, 인터뷰를 이렇게 해보니까 많은 것을 알아가고 그래서 즐거움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전쟁에 대한 저의 생각은 일단은 정말 잔인한다고 생각하고, 많은 사람들이 죽고,
많은 나라들이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싸운다는것이 이해가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저의 전쟁에 대한 생각입니다.
<민이 느낀 점>
저번에도 세미나를 했었는데 이번에는 느낌이 또 다른 것 같다.
전쟁박물관에서도 이번에는 차마 사진을 보지 못했다.
독립궁을 두 번이나 가서 힘도 들었지만 세미나가 잘 마무리 됐으면 좋겠다.
그리고 전쟁에 대한 저의 생각은 전쟁... 항상 싫다.
전쟁을 왜 하는지 모르겠다.
말로 해결할 수 있는데. 권력이랑 욕심이 항상 문제인 것 같다.
난 그런 사람이 되지 말아야지.. 평화가 좋은 것 같다.
(지금까지 민과 조의 세미나 자료였습니다!~~ 피쓰!!!!!!)
--------------------------------------------------
'전쟁'
이 두 글자를 듣고 아이들이 느끼는 생각, 감정들이 어떤 방향으로 향하게 되었을까요?
조금씩 조금씩, 한 걸음 한 걸음, 세상을 보는 눈을 키워나가는 로드팀입니다
피쓰!
'이것저것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솔리니 시신 - 2차대전 세 악당의 최후 (0) | 2015.02.22 |
---|---|
<펌> 통풍의 원인, 증상, 치료방법 (0) | 2015.02.15 |
오마주, 표절, 패러디? (0) | 2015.01.17 |
성균관대사성 영일정씨 정유번의 묘 (0) | 2015.01.10 |
황반변성 - 휘어져 보이지 않길 (0) | 2015.01.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