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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 소개

오랜만의 여유 -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6

by 정가네요 2011. 10. 4.

 

*

오랜만에 여유있는 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아침을 느지막이 먹은 후, 옆지기와 함께 이틀 동안 껍질을 벗긴 토란대를 마당에 널고서는

커피 한 잔을 타서 들고 동산 가운데에 있는 작은 아그배나무 밑으로 갔습니다.

볼품없는 조립식 평상이긴 하지만 거기서 보면 우리집이 제일 예쁘게 보이거든요.

문화재청장을 지낸 유홍준 씨가 쓴 책,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6'

'인생도처유상수'를 펴서 가부좌를 하고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6권에서 제일 먼저 읽은 부분은 '선암사' 얘기였습니다.

10년 전부터 내가 해마다 한두 번씩은 꼭 찾던 아름다운 절 선암사.

가려운 곳을 잘 긁어주는 정말 훌륭한 글이었습니다.

뒤 이어 다른 곳을 다 읽고서 '경복궁' 부분은 제일 마지막에 읽으려고 남겨두었지요.

 

유홍준 씨의 글은 어김없이 나를 우리 문화재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하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경복궁 앞 부분에 나오는 다음 이야기는 백미였습니다.

 

'경복궁은 거기에 북악산과 인왕산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지어진 건축이다.

궁궐 너머로 보이는 북악산과 인왕산은 경복궁의 가시적 정원인 것이다.

2009년 가을 LA카운티 미술관(LACMA)이 한국미술 전시실을 지하 35평에서 지상 170평으로 확장 신설하면서

개관기념으로 한국미술의 정체성에 관해 강연해줄 것을 요청했을 때

내가 택한 주제는 '한국의 자연과 건축'이었다.

 

이때 나는 인왕산과 북악산을 배경으로 한 근정전(勤政殿) 사진을 비추면서 경복궁 건축을 이야기했다.

강연이 끝나고 다과회 자리에서 LACMA의 후원회원이라는 한 미국인이 나에게 다가와 확인하는 질문을 했다.

 

"당신이 보여준 왕궁 사진은 강연 제목(자연과 건축)에 맞추어 만든 합성사진이었습니까?"

 

우리는 너무도 익숙한 경관이어서 별것 아닌 줄 알고 한국의 건축이라면 당연히 그런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한국에 와보지 않은 그에게는 상상이 가지 않는 신비롭고도 환상적인 가상의 아름다움으로 보인 것이다.

 

세계 어느 나라 왕궁에 그런 산이 있는가. 자금성 주위에도 그런 산이 없다.

그래서 그들은 연못에서 파낸 흙으로 자금성 북쪽에 우리의 북악산에 비하면 '뒷간'보다도 작은 가산(假山)을 만들었다.

그리고 자금성에 들어서면 나무 한 그루 없다. 자객이 들어올까봐 있던 나무도 다 없애버린 것이다.

그렇게 철저히 자연을 배재할 수가 없다.

경복궁의 각 권역을 이어주는 길에는 아름다운 소나무, 버드나무, 때죽나무, 마가목, 산딸나무 등

각 건물에 어울리는 나무들이 배치되어 있다. 그 종류가 100종이 넘는다.

경복궁과 자금성을 비교했을 때 가장 큰 차이는 바로 자연과의 어울림이다.

자금성은 자금성이고 경복궁은 경복궁이다.

 

한 나라의, 그것도 새로 건국한 나라의 수도를 건설하고 왕궁을 짓는 일은

어느 산자락에서 *장풍득수(藏風得水)하여 지기(地氣)를 받아 발복기원(發福祈願)하는 일반적인 민가의 풍수가 아니었다.

국가를 경영하는 중심지로서 수도가 될 만한 곳을 국토 전체에서 찾고

그중에서도 국가의 존엄을 만천하에 드러낼 수 있는 곳을 왕궁자리로 찾았던 것이다.

 

여기까지 읽고선 책을 덮고 앞을 바라보니

'정가네동산'이 바로 장풍득수하여 지기를 받아 발복기원하는 민간풍수의 최적지로 보였습니다.

누가 뭐라고 하든 내가 보기엔 그랬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느긋하게 좋은 책 몇 페이지를 읽었습니다.

아름다운 가을입니다.

 

* '바람은 감추고 물을 얻으며, 땅의 정기를 받아 복받기를 기원한다'는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명당의 요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