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 https://www.nongmin.com/plan/PLN/SRS/290271/view
21세기 이솝우화 - 은혜를 베풀면 보답이 따른다
타인이 가장 어렵고 힘든 시기
아름다운 도움의 손길 내밀면 언젠간 내게 그대로 돌아와 베푸는 대로 받는다
개미가 목이 말라 물을 찾아 샘물가로 갔다. 조그만 옹달샘이 아니라 작은 개울과 연결된 샘물이었다. 개미는 앞발로 버틴 채 길게 목을 내밀어 물을 마시려고 하다가 그만 물에 빠져버렸다. 헤어나지 못하면 냇물을 따라 떠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누가 절 좀 도와주세요.” 개미는 소리쳤지만 그야말로 개미소리라서 아무도 듣지 못했다. 샘물가 나무 위에서 이 모습을 보고 있던 비둘기가 작은 나뭇가지를 부러뜨려 샘물에 던져줬다. 개미는 물 위에서 버둥거리다가 간신히 나뭇가지에 기어올라 살아났다.
얼마 후였다. 사냥꾼이 새를 잡는 끈끈이 채를 이어붙인 나무막대기를 들고 숲속에 왔다. 사냥꾼은 소리를 죽이며 살금살금 비둘기가 앉아 있는 나무로 다가갔다. 이제 나무 아래에서 끈끈이 채를 들어올리면 비둘기는 여지없이 잡히고 말 순간이었다.
그 모습을 개미가 봤다. 비둘기는 자신에게 위험이 닥친지도 모르고 있었다. 개미는 끈끈이 채를 든 사냥꾼의 발목을 힘껏 물었다. “아이 따가워!” 사냥꾼은 손에 든 끈끈이 채를 떨어뜨렸다. 비둘기가 그 상황을 눈치채곤 하늘로 날아갔다.
최근 남북정상간의 대화로 새로운 평화시대가 다가오는 분위기다. 이런 해빙무드 속에서 이 이솝우화와 관련해 필자가 어린 시절 본 시골마을 일 하나가 떠올랐다. 우리 동네 명수 형은 아버지 없이 어머니와 단둘이 살았다. 명수 형 아버지는 6·25전쟁 때 전장에 끌려갔다고 했다. 그러나 그 말을 할 때 어른들은 뭔가 쉬쉬하는 분위기였다. 자라면서 그것이 그냥 끌려간 것이 아니라 의용군에 지원해 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때 명수 형은 막 돌이 지난 아기였다고 했다.
당시 아버지가 없다는 것은 그 집에서 논과 밭에 나가 일을 할 노동력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작은 텃밭 하나를 부치는 것도 누군가 소로 밭을 갈아줘야 가능했다. 따라서 명수 형 어머니 혼자 아무리 애써도 늘 가난할 수밖에 없었다. 명수 형이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졸업한 것은 명수 형 어머니가 억척스레 날품을 팔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세상 모든 어머니가 자식을 위해 희생하지만 명수 형 어머니의 희생은 마을에서 본보기와 같았다.
늘 억눌린 삶을 살아온 명수 형은 떳떳하게 경찰이 되고 싶어했다. 하지만 그 시절엔 불가능한 일이었다. 경찰이나 군대의 장교가 되려면 국가기관에서 실시하는 신원조회를 통과해야 했다. ‘어느 동네에 사는 누가 경찰시험에 합격했는데 신원조회에서 떨어졌다더라’ ‘누구 집 아들은 육군사관학교 시험에 붙었는데 삼촌의 예전 행적이 드러나서 못 가게 됐다더라’ 그런 소문이 어린 우리 귀에까지 들릴 만큼 연좌제의 그늘은 끈끈이주걱처럼 음험하고 무서웠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명수 형이 방위병으로 군복무를 마치고 직장에 취직할 때의 일이었다. 그곳에서도 명수 형에 대한 누군가의 신원보증이 필요했다. 그러나 마을 사람 어느 누구도 선뜻 명수 형의 신원을 보증해주려 하지 않았다. 사람들 인심이 야박해서가 아니라 그 시절 전쟁을 겪은 어른들은 물론 자라나는 아이들까지 자나 깨나 반공에 가위눌려 있었기 때문이다. 혹시나 잘못되면 함께 경을 칠 일이라는 걸 너무도 잘 알아서였다. 그런데 그때 마을에서 신망받는 한 어른이 명수 형의 신원을 보증해줬다.
아마 부탁도 공개적이 아니라 은밀히 진행됐을 것이다. 공개적으로 하면, 될 일도 안되는 쪽으로 방해받기 쉬웠다. 명수 형과 형의 어머니가 사람 목숨 하나 살려주는 셈 치고 도와달라고 부탁했을 것이고, 그 어른도 물에 빠진 개미에게 나뭇가지 던져주는 심정으로 그 부탁을 들어줬을 것이다. 덕분에 명수 형은 그 직장에 들어갔고 이사를 해 거기에 대해 마을에서 이러쿵저러쿵 말이 없었다.
지금은 명수 형 나이가 일흔살에 가까워 그 직장에서 나온 지도 오래됐다. 하지만 형은 직장에 다니는 동안 자신의 보증을 서줬던 그 어른의 은혜를 잊은 적이 없었다. 명절마다 찾아갔고, 어른이 편찮을 때는 직접 서울의 큰 병원으로 모셔가기도 했다. 어른이 돌아가셨을 때는 일부러 휴가를 내 장례에도 참석했다.
그 모습을 보고 마을 노인들이 부러워했지만, 한 사람 인생의 가장 어렵고 힘든 시기에 아름다운 도움이 있었음을 모르는 것 같았다. 후일에 되돌려 받으려고 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어려운 시기에 베푼 은혜에는 또 이렇게 보답이 따르는 법이었다.
- 이순원<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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