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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글

해학과 풍자

by 정가네요 2017. 1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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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학과 익살, 유머, 위트, 골계, 풍자 등의 경계는 분명하지 않다.

특히 해학과 풍자는 비판을 동반한 웃음이라는 점에서 곧잘 혼용된다.

하지만 해학과 풍자는 다르다.


이희승은 해학이 곡선성을 갖고 있다고 했다.

해학이 곡선이라면 풍자는 직선이다.

풍자는 주체와 대상과의 거리가 짧아 에둘러 갈 여유가 없다.

급소를 겨냥해 정면에서 찌르는 칼과 같다.

해학은 멀리서 날린 화살이다.

급소를 맞추지 않아도 아픔은 깊고 오래간다.

그만큼 반성도 길다.


풍자가 현실 속에서 현실을 비판하는 태도라면 해학은 현실을 비켜서서 보는 태도다.

그래서 해학은 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내려다보는 넉넉함을 지닌다.

도덕군자의 신념에 찬 삶도 해학의 시선으로 보면 웃기는 희극일 수 있다.

해학은 조요한의 말처럼, 근저에 일종의 윤리성ethos이 있는 웃음,

일상에서 발견되는 졸렬한 모습들에 대한 고발정신이 깃들어 있는 웃음이다.

해학은 자기 자신조차 한발 물러서서 볼 수 있게 한다.

해학의 유희적 속성은 우리 삶의 희로애락을 웃음으로 승화시켜 받아들이게 한다.

해학 안에서는 성聖과 속俗까지 하나가 될 수 있다.


「 화려한 오독」은 처음부터 해학적이다.


화려한 오독 / 임영조


장마 걷힌 칠월 땡볕에

지렁이가 슬슬 세상을 잰다

시멘트 길을 온몸으로 간 자국

행서도 아니고 예서도 아닌

초서체로 갈겨쓴 일대기 같다

한평생 초야에 숨어 굴린 화두를

최후로 남긴 한 행 정명시 같다

그 판독이 어려운 일필휘지를

촉새 몇 마리 따라가며 읽는다

혀 짧은 부리로 콕콕 쪼아 맛본다

제멋대로 재잘되는 화려한 오독

각설이 지렁이의 몸보다 길다

오죽 답답하고 지루했으면

隱者가 몸소 나와 배밀이 하랴

쉬파리떼 성가신 무더위에

벌겋게 달아오른 肉頭文字로.


- 『시를 읽는 즐거움』/ 이윤옥 / 문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