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01450.html
[곽병찬의 향원익청] 우파여, 이 사람을 보라
- 등록 :2017-07. 한겨레
사람들이 ‘벽옹(?翁)이라 하게’ 하기에 좋다고 하였다.” 심산 김창숙이 벽옹 김우라 불리게 된 사연이다. 그의 어리석음은 “성인의 글을 읽고도 그가 시대를 구하려 한 뜻을 얻으려 하지 않는다면 이는 거짓 선비”라는, 고집스레 지킨 신념에서 비롯됐다.
5월10일 심산은 ‘칼날 위의 한평생’을 마감했다. 시인 구상은 이렇게 오열했다. “…당신 계셔 대한이 가득하더니, 당신 가셔 대한이 빈 것만 같소이다….”
“어려서 몹시 미련하더니 늙어서 더욱 어리석었다. 사람들이 ‘우(愚)라 부르세’ 하기에 좋다고 하였다. 어려서 잔병이 많더니 늙어서 앉은뱅이가 되었다. 사람들이 ‘벽옹(?翁)이라 하게’ 하기에 좋다고 하였다.” 심산 김창숙이 벽옹 김우라 불리게 된 사연이다. 그의 어리석음은 “성인의 글을 읽고도 그가 시대를 구하려 한 뜻을 얻으려 하지 않는다면 이는 거짓 선비”라는, 고집스레 지킨 신념에서 비롯됐다.
26살 때인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스승(대계 이승희)과 함께 경복궁 앞에서 5적의 목을 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민족운동에 발을 디뎠다. 귀향해 대한협회 성주 지부를 결성하고, 성주에 사립 성명학교를 설립했다. 1909년 송병준 이용구 등 일진회가 한일합방을 재촉하는 상소와 청원을 조정과 일본에 하자, ‘역적을 토멸하지 않는 자 또한 역적’이라는 서슬 퍼런 내용의 ‘일진회 성토 건의서’를 냈다. 그 일로 8개월간 수감되면서 그의 결기는 세상에 알려졌다.
병탄 이후 광인처럼 지내던 심산을 독립운동의 최전선으로 떠민 것은 3·1운동이었다. 파리만국평화회의에 조선의 독립을 청원하기 위해 전국을 다니며 유림 137명으로부터 서명을 받았다. 서명이 첨부된 장서를 휴대하고 중국으로 건너가 이미 파리로 떠난 김규식을 통해 해외에 전파했다.(1차 유림단 사건) 서로군정서 군사선전위원장에 추대됐고, 1925년 몽골에 군사기지를 세우기로 하고 국내에 잠입해 군자금을 모았다.(2차 유림단 사건) 이듬해엔 동척 및 식산은행에 폭탄을 던진 나석주 의사의 의거를 지원했다. 장남 환기가 일경의 고문으로 사망한 1927년 그는 상하이에서 지병을 치료하던 중 체포돼 국내로 압송됐다.
10년 가까이 신출귀몰했던 심산이었으니, 독이 오른 일제는 전기고문은 물론, 통닭구이, 압슬(정강이뼈 짓이기기) 등 온갖 고문을 가했다. 그러나 심산에게서 구한 것은 시 한 편뿐이었다. “조국의 광복을 도모한 지 십 년, …뇌락한 내 평생 백일하에 분명하거늘, 고문을 야단스레 할 필요가 무엇인가.” 그는 ‘구차하게 삶을 구하지 않겠다’며 변론도, 항소도 모두 거부했다.
유례없는 징역 14년형이 떨어졌다. 고문으로 하반신 불구가 된데다 지병이 악화돼 병감에 갇혔다. 그러나 형무소의 지시를 따르지 않아 독서와 집필을 금지당하거나 잡범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지병이 심각해지자 일제는 1934년 보석으로 풀어주었다. 울산 백양사에 사실상 연금돼 요양할 때는 일경이 창씨개명을 거듭 압박했다. “병들어 죽을 날도 머지않았으니, 감옥에 넣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라.”
결기는 해방 후 오히려 더 날카로워졌다. 그 칼날은 친일파와 찬탁, 단정론자를 향했다. 한민당 당수 송진우를 불렀다. 송진우는 올곧은 민족주의자였지만, 한민당은 악질 친일부호들 중심으로 이승만을 옹립하려 했다. “한민당이 왜 외면당하는지 아시오.” “가르침을 주신다면….” “두 가지 길이 있소. 악질 친일분자를 숙청하거나 아니면 그대가 당에서 떠나는 것이오.”
반탁을 외치던 좌익이 돌연 찬탁으로 돌아섰다. 남로당 지도자들을 집으로 불렀다. 남로당 조직부장 이승엽과 이우적, 이관술 등이 왔다. “미국이란 이리를 견제하려면 소련이 필요합니다.”(이관술) “저도 이리요 이도 이리다. 한 이리를 견제하기 위해 다른 이리를 끌어들이는 격이니 우리 한인은 두 이리의 이빨에 종자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전쟁이 터지고 이승엽이 서울시 인민위원장이 되었다. 부하들을 통해 자수 성명서 발표를 거듭 압박했다. 통하지 않자 이승엽이 직접 찾아와 준비해 온 선전 방송용 원고를 내밀며 서명을 요구했다. “내 생사는 네 마음에 달렸으니, 자 나를 쏘라. 나는 김일성을 지지할 수 없다.”
가장 치열하게 맞선 것은 이승만이었다. 상하이 임시정부 시절 미국에 조선의 위임통치를 청원한 임시대통령 이승만에 대해 탄핵을 제기해 관철했다. “이번에는 미국의 노예로 만들겠다는 것인가.” 심산은 그 일을 “독립운동을 하던 중 가장 통쾌했던 일”이라고 말하곤 했다.
해방 후 이승만은 미군정을 업고 유력자가 되었다. 신탁통치에 대한 이승만의 뜻을 알고자 단도직입으로 물었다. 이승만은 미국의 눈치를 보느라 횡설수설했다. “(신탁통치가) 미국의 정책으로 확정된 건 아닌데…, 건국에 가장 필요한 게 재정인데, 재력을 동원할 수 있는가.”
김구 등 반탁 진영은 비상국민대회의를 통해 새 정부 수립의 모체로 최고정무위원회를 두었다. 그런데 위원회가 졸지에 미군정청장의 자문기구(남조선민주의원)로 바뀌어 있었다. 의장 이승만이 꾸민 짓이었다. 1946년 2월18일 정무위원회에서 이승만에게 심산이 따졌다. “당신은 오늘 이미 민족을 팔았거니와 어찌 다른 날에 국가를 팔지 않는다 보장하겠소?” 허겁지겁 퇴장하는 이승만의 등 뒤로 심산이 외쳤다. “어찌 그리도 비겁한가!”
권좌에 오른 이승만은 오로지 권력을 굳히는 데 혈안이었다. 정적들을 빨갱이로 몰아 제거하거나 암살했다. 부산으로 피난가서도 마찬가지였다. 수많은 청장년들이 굶어 죽고 얼어 죽은 국민방위군 사건, 거창 등지에서의 양민학살 사건, 중석불 사건 등이 잇따랐다. 1951년 봄 심산은 이승만 하야 경고문을 발표했다. 그는 수감됐다.
이듬해 이승만은 국회프락치 사건을 조작하고 정치깡패와 어용단체를 동원해 개헌을 추진했다. 심산과 야당의원 60여명이 참가한 부산 국제구락부 반독재호헌구국선언이 열린 것은 그때였다. 대회장은 정치깡패의 테러로 피투성이가 됐다. “심산은 땃벌떼에게 테러를 당하여 머리가 터지셨다. 의장석에 앉은뱅이 애국투사 한 분만 두고 조병옥, 이시영, 장택상 등 참가자 전원은 피신했다. 비참한 현실에 원통해서 통곡을 참을 수 없었다.”(며느리 손응교) 벽옹 심산은 폭행을 고스란히 당해야 했다.
이승만의 보복은 집요했다. 심산이 피땀 흘려 복원하고 설립한 유도회와 성균관대에서 그를 쫓아냈다. 1956년 2월엔 총장직을 박탈하고, 이듬해 7월엔 유도회 대표자대회를 유린하고 친일파 이명세 이범승 윤우경 등을 집행부에 앉혔다. 개신교 장로인 이승만 자신은 총재가 되었다. 낙향한 심산은 ‘반귀거래사’에서 통한을 이렇게 담았다. “…저기 저 사이비, 군자들, 맹세코 이 땅에서, 쓸어버리리, 길에서 죽기로니, 무슨 한이랴.”
심산은 고향에 오래 머물 수 없었다. 1958년말 자유당 정권은 ‘신국가보안법’을 날치기했다. 4대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국민의 입을 틀어막으려는 것이었다. 심산은 손자의 등에 업혀 상경했다. 다시 이승만의 하야를 촉구하며 민권쟁취와 구국운동을 위한 전국민총궐기연합체 구성과 함께 반독재투쟁에 나섰다. 이후 3·15 부정선거가 저질러졌다.
4·19 혁명 이후 그는 민족자주통일 문제에 천착했다. 시민사회단체들은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를 결성하고 그를 대표로 추대했다. 그러나 이듬해 5·16 쿠데타는 그의 꿈을 다시 짓밟았다. “…통일은 어느 때에, 이루어지려는가, 밝은 하늘 정녕, 다시 안 오면, 차라리 죽음이여, 빨리 오려무나.”
사경을 헤매던 1962년 5월초 박정희가 병문안차 중앙의료원 병실로 방문했다. 친일 부역 경력을 세탁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이런 인연도 있었다. 심산의 둘째 아들 찬기와 박정희의 둘째 형 상희는 가까웠다. 찬기는 1927년 진주학생운동을 주도했고, 상희는 신간회 선산지부의 간부로 활동하고 있었다. “당시 두 사람은 성주와 선산 젊은이들의 우상”(찬기의 둘째 딸 김주)이었다. 찬기는 부친의 뜻을 따라 1943년 충칭의 임시정부로 탈출했다가 그곳에서 죽었고, 상희는 1946년 대구 10월 항쟁 때 경북 선산에서 경찰과 대치하다가 죽었다. 박정희는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5월10일 심산은 ‘칼날 위의 한평생’을 마감했다. 시인 구상은 이렇게 오열했다. “…당신 계셔 대한이 가득하더니, 당신 가셔 대한이 빈 것만 같소이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01450.html#csidxe1a79b77884fa408b53776ddc32509d
'좋은글. 읽을거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펌> 누구에게나 노조가 필요해 / 박점규 (0) | 2017.08.02 |
---|---|
<펌> 모래톱을 살려야 녹조라떼 사라진다 / 오경섭 (0) | 2017.07.25 |
<펌> 대한민국의 저주, 군사주의! / 박노자 (0) | 2017.06.23 |
<펌> 현충일 추념사 / 문재인 (0) | 2017.06.23 |
<펌> 흙의 비밀 / 류길곤 (0) | 2017.06.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