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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저것 모음

<펌> 김천 - 청포도와 직지사 / 김산 김종인

by 정가네요 2014. 6. 11.

 

 

청포도와 직지사

 

- 김종인

 

                                         

1. 그 뜨거웠던 유월도 가고

 

  그 뜨거웠던 유월의 함성도 하마 한 달이 지나니 아득하다. 장마 같지도 않은 장마가 태풍 몇 개에 밀려가더니, 세상은 온통 삼복염천, 연일 삼십 몇 도의 땡볕이 천지를 달군다. 바야흐로 피서의 계절이다.

 

  저마다 식솔을 대동하고 산으로 바다로 떠나는 계절에 즈음하여 한 마디 하고 싶은 것은, 명절마다 천 몇 백만이 고향으로 민족대이동을 하면서도 막상 여름 피서 휴가철에는 고향을 버리고 타지의 명산대천이나 바다로만 몰려가니 이제 그러지 말고 아름다운 고향 산천에서 피서 휴가를 보내면 어떨까 하는 것이다.

  고향을 떠난 사람이나 고향에 사는 사람이나 자기가 태어난 고향에 대해서 모르기는 피차일반이니, 고향 산천의 아름다움과 자랑거리를 이 기회에 자식들에게 가르쳐 주는 피서 휴가가 되면 오죽 좋을까. 더불어 고향을 지키는 늙으신 부모님께 효도까지 겸한다면 일거양득이 아니겠는가!

 

 

2. 새까만 캠베일리 포도의 고장 김천

 

  내 고향 김천을 생각할 때, 늘 함께 떠오르는 이미지는 바로 이육사 시인의 청포도이다.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를 읊조리다 보면 고향에서 탐스럽게 익어 가는 새까만 포도가 떠오르는데, 김천 포도의 상징이 바로 이 새까만 캠베일리 포도이다. 김천은 가히 둘째 가라면 서러운 포도의 고향이다. 재배 면적이 무려 2576ha에 약 5만 톤을 생산하니 생산 비율 전국의 13%가 넘고, 전국에서 가장 먼저 노지 포도를 생산하는 재배 기술과 아름답고 당도 높은 포도로 전국에 이름이 높다.

 

  여름에 김천에 오면 경부고속도로 김천인터체인지를 나오자마자 멀리 눈에 보이 곳은 모두 포도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니, 김천 지역 어느 곳을 가더라도 좌우에 포도밭이 없는 곳이 없다. 톨게이트를 나와 직지천 다리를 건너면서 서쪽으로 우회전하면 김천시 부곡동을 돌아가는 4차선 우회도로인데, 여기서부터 직지사 방면으로 곧장 달려 올라가면서 좌우에 보이는 것은 모두 포도밭이다.

 

  백두대간이 호랑이 등뼈를 타고 내려오다가 태백, 소백을 지나고 눌의산과 추풍령을 넘어 황악산 1111m를 솟구쳤으니 여기가 바로 삼한대처 김천 고을의 그 황악이다. 누가 김천을 모른다 했는가. 서울-부산의 중간이며, 영남-호남의 경계이며, 경상도-전라도-충청도의 지경에 우뚝 선 삼도봉이 바로 김천에 있다.

  김천은 경상북도의 서북부에 위치하여 경부선의 주요 역인 대구. 대전간의 중간 지점으로 문경과 영주로 통하는 경북선의 시발점이 되고, 동남으로 성주. 진주, 서방으로 무주. 거창, 동북으로 안동. 문경을 연결하는 국도가 자연적으로 형성, 교통망이 4통 5달이며 32.3km의 고속도로가 남북으로 관통되어, 자고로 지리적 요충으로서 농산물의 집산을 이루고 있다. 동방과 남북에 해발 977m의 금오산과 연결된 백마산과 효자봉이 솟아 있고, 대덕산과 그 계곡을 따라 지례로부터 북류하는 감천과 서북으로 고성산, 황악산이 추풍령과 인접해서 웅장하게 흘러내려 여기서 동류하는 직지천이 합류되어 낙동강의 지류를 이루고 있다.

 

 읍면동 합쳐서 22개에, 서울시의 두 배에 가까운 면적에, 인구 15만 명이 498개의 자연부락을 이루고 살아가는 이 곳을 자고로 삼산이수의 고장이라 했으니.....

 

  김천의 별호는 금릉인데, 예로부터 삼산이수의 고장이라고 했다. 금릉이란 말은 옛날(서기 314년) 중국 동진이란 나라가 서고 건업에 도읍하여 수도를 금릉이라 한 데서 유래된다. 그 뒤 여러 번 나라가 바뀌면서도 이곳에 도읍했기 때문에 고도로서 유적이 많고 경관이 아름다워 역대 시인들이 즐겨 시제에 올렸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이백의 <금릉 봉황대에 올라>라는 시인데, 이백은 최호의 <황학루에 올라>라는 시에 감복되어 이와 겨루기 위해 지었다고 한다. 이백의 시 가운데 '금릉'이니 '삼산이수'니 '봉황대'니 '황학산‘이니 하는 말들이 나오는데, 김천 지방의 여러 이름   들도 모두 여기에서 따온 것이다.

 

  우리 땅 구석구석 역사와 문화와 유래와 자랑거리가 없는 곳이 없지마는 김천에는 국보와 보물이 17점이나 있고, 지정문화재가 모두 52점이나 되며, 5박 6일 동안은 봐야 다 돌아볼 수 있는 문화관광지가 있다. 그야말로 산고수려한 골골이 천연계곡 쉼터이며 처처에 볼거리가 즐비하다.

 

 

3. 철따라 따로 보임은 한갓 마음의 탓이랄까

 

  타지에 가서 김천을 물어보면 으레 김천 직지사를 얘기하는데, 이제 직지사로 올라가 보자.

 

  우회도로를 지나 직지사 방면으로 4번 국도를 타고 시속 80Km로 이삼 분만 달리면 눈앞으로 거대한 문이 달려오는데, 바로 ‘영남제일문’이다. 한식 목조 맞배지붕과 팔작지붕 양식으로 지붕 길이 50미터, 높이 12미터의 문인데, 명필 여초 김응현이 글씨를 쓰고, 김각한이 서각을 했다.

 

  이 문을 지나 직지사 검문소에서 좌회전하면, 바로 오른쪽 옆으로 직지천의 물소리가 들리니 여기서 5분만 직진으로 달려 올라가면 직지사이다.

 

  복전동 금성묵집을 지나고, 경부선 굴다리를 거쳐 기날못을 지나, 김천파크호텔을 우측으로 던져두고, 조금 더 올라가면 ‘동국제일가람황악산문’이 나오는데, 역시 여초의 글씨다. 표를 끊어 안으로 들어가면 좌측에 직지사 시비가 있다. 화강암으로 된 시조비에는 백수 정완영의 ‘직지사운’이란 시조를 천하명필 일중 김충현이 썼다고 되어 있다.

 

  “매양 오던 그 산이요 매양 보던 그 절인데도/

   철따라 따로 보임은 한갓 마음의 탓이랄까.(직지사운 첫째 수 초중장)

 

  그렇다. 직지사는 30여 년 전부터 매양 오는 절이건만 30여 년 불사로 34개 동을 새로 짓고, 31개 동을 중수, 중건하여 올 때마다 한두 개씩 거대한 절집이 들어섰으니 철마다 따로 보임도 어쩌면 현실이다. 이제 월드컵 기간 중 각국 외교 사절들이 절집체험(템플스테이)을 할 정도로 거대한 규모를 갖춤은 물론이요, 최신 설비까지 완비되어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8교구 본사이다.

 

  거대한 만덕전의 동기와를 보면서 백 년 뒤의 직지사를 생각해 본다. 누가 뭐래도 직지사는 역사와 전통과 유래가 깊은 고찰이다

 

  신라 눌지왕 2년(418) 아도화상에 의하여 도리사와 함께 개창 되었다. 그 사명을 '직지'라 함은 '직지인심 견성성불'이라는 선종의 가르침에서 유래되었다 하며, 또 일설에는 창건주 아도화상이 일선군 냉산에 도리사를 건립하고, 멀리 김천의 황악산을 가리키면서 저 산 아래도 절을 지을 길상지지가 있다고 하였으므로 직지사라 이름했다는 전설도 있다. 또는 고구려의 능여화상이 직지사를 중창할 때 자를 사용하지 않고 직접 자기 손으로 측지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란 설도 있다.

 

  이는 모두 창건 설화와 연관된 직지의 미화된 전설에서 유래되고 있지만, 실은 불교 본연의 직지인심을 상징하는 선가의 직지가 둘이 아님을 볼 때, 이는 불교의 본질을 나타내는 이름이라 하겠으며, 또한 사명에 불교의 본질을 이처럼 극명하게 나타내는 사찰도 흔치 않으리라.

 

  직지사의 중요 유물로는 석조약사여래좌상(보물 제319호), 대웅전삼존불탱화(보물 제670호), 대웅전 앞 동서삼층석탑(보물 제606), 비로전 앞 삼층석탑(보물 607호), 청풍료 앞 삼층석탑(보물 제1186호)을 비롯하여 사적비와 괘불, 영탱 등 상당수에 달하고 있다.

 

  만세교를 지나 일주문을 가기 전에 새로 생긴 비가 있는데, 192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직지산문을 지킨 포월당의 비석이다. 이 비의 첫머리에 일렀으되 “나라가 바로 서지 못하면 정사가 위사 속에 파묻히고, 인심이 어지러우면, 진실이 비리 앞에 고개를 들지 못 한다”고 했다. 머리를 죽비로 내려치는 말씀이다.

 

  직지 입구에서 벌써 이런 말씀을 얻으니, 일주문을 지나 대웅전을 지나 사명각에 가서야 이 절이 보통 절이 아님을 알 것이다.

 

  16세 경에 출가한 사명 대사는 18세가 되는 명종 16년(1561)에 이미 선과에 합격하였고, 30세가 되는 선조 6년(1573)에는 그의 법계가 중덕으로 직지사 주지가 되었다. 그는 30세 되는 4월에 <허응당집>을 교정하고 발문을 썼는데 이곳에는, "직지사주지 중덕 유정 교"라고 되어 있다.

 

  그는 은사 신묵 화상의 뒤를 이어 직지사의 주지 직을 수행하였으며, 선당을 중수하는 등 불사에 진력하였다. 사명 대사는 16세에 직지사에 입산하여 약 16년 이상 이곳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고 짐작된다. 이 때에 이미 그의 명성은 세간의 문장 재사들 간에 널리 알려져 있었고 그들과 많은 교류가 있었다.

 

  32세 되는 선조 8년(1575)에는 당시 선종의 중심이었던 봉은사 주지가 되었으나, 곧 사양하고 묘향산으로 가 서산대사의 법을 이었다.

 

  이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승병을 일으켜 국란 퇴치에 앞장섰고, 특히 적진과 일본을 왕래하면서 이룩한 강화조약을 비롯한 외교적 역할은 우리의 역사에 너무나 유명하다. 그가 스승 서산대사를 만나 대외적 활동을 전개하고 전란 극복의 선봉에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은 직지사를 중심으로 한 젊은 시절의 수도 생활 속에서 이룩되었다고 하겠다.

 

  사명각을 지나 비로전을 보고 도피안교 너머 황악을 한번 우러러 본 뒤에 아래로 내려오면 경내에 ‘산중다실’이라는 전통 찻집이 있다. 이 산중다실에는 겨울에는 진한 송차요, 여름에는 얼음을 띄운 오미자차가 일미이다.

 

 

4. 바람재를 넘어 무흘구곡까지

 

  김천의 상징, 직지사를 나와 내려오다가 다시 산중으로 우회전하면 구성면으로 넘어가는 바람재가 있다. 한여름밤 수많은 반딧불이를 보려거든 바람재로 가라. 유난히 빛나는 별들과 함께 수많은 반딧불이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바람재를 넘어 꽃처럼 예쁜 이름의 화실을 지나 공자동으로 내려가면, 연안 이씨들의 집성 마을이자 영남대학교 이동순 시인의 고향 상좌원이 있다. 여기서 방초정을 보는 즐거움을 더하니......

 

  방초정은 연안 이씨 문중의 소유로 상원 출신 유학자 이정복이 선조를 추모하기 위하여 1625년(인조 3년)에 지금 위치보다 국도 쪽으로 정자를 건립하였다.

  1689년 퇴락한 것을 그의 손자 이해가 중건하고, 1727년에 다시 보수했으나 파손되었고, 1736년의 큰 홍수로 유실된 것을 1788년에 가례증해를 저술한 이의조가 지금의 자리에 3창을 했다.

 

  방초정은 2층 누각으로 2층에 문을 달아 이를 걷어올리면 넓은 마루가 되고, 내려 닫으면 방으로 쓰이게 했으며, 사방에 난간을 둘렀다. 이와 같은 누각의 형태는 보통 방이 양 끝에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뜰 앞에는 연못이 있는데, 중앙에 섬을 둘로 배치해 독특한 정원 형태를 이루어 조선시대의 정원 조경의 연구 자료가 되고 있다.

 

  이곳은 유명한 문장, 묵객들이 많이 찾아 시와 글씨를 남겼는데 방초정 현판은 김대만의 글씨라 한다.

 <방초정 전경>

 

  이제 김천의 젖줄 감천을 따라 올라가면 한여름 피서지가 한두 군데가 아니다. 지례토종 도야지를 먹고, 대덕 조룡리의 천연기념물 은행나무를 보고, 지금도 힘차게 돌아 방아를 찧는 90년 된 거대한 물레방아를 지나 증산면으로 넘어가면, 옥수청암 푸른 산중에 청정도량 비구니들의 청암사가 있다.

 

  수도계곡은 깊고 길다. 사시사철 물은 맑고 서늘하다. 수도암은 불영산(해발1360m)중턱에 위치한 깊고 그윽한 절이다. 절 위치도 1050m의 고지대이므로 여름에도 모기가 없고 그 아래 마을과는 한달 가까운 계절 차이를 보이고 있다.

 

  본래 불영산은 수도산이라고 불려져 왔는데 100여 년 전부터 부처님의 영험과 가호가 많다 하여 불영산이라고 고쳐 불렀으며, 이곳 석불 이마에서부터 자주 방광이 있었으므로 불영산이라 불리워졌으며 수행자가 모여 수도하고 마음을 밝히는 곳이라 하여 수도암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수도계곡을 따라 내려가면 무흘구곡이다. 성주의 큰선비이신 한강 정구 선생이 ‘무흘구곡가’로읊었던 절경이다.

 

 

5.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리

 

  이렇게 많은 문화재와 깊은 계곡과 폭포와 먹거리가 어우러져 있는 곳이 김천이니 고향을 떠나 서울 생활에 지친 사람이나, 여름철 피서지를 찾는 사람이나, 이 땅의 구석구석을 답사하는 사람이나, 어디론지 떠나 조용히 휴가를 즐기려는 사람에게 어찌 소개하지 않을 수 있으랴.

 

  포도의 고장, 인심 좋은 김천 사람들은 이육사의 청포도에 나오는 시구처럼 ‘은쟁반에 모시 수건으로 마련해 두고, 내 그를 만나 이 포도를 따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니’ 한 번 내려와 보는 것이 어떨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