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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권태로운 인간관계, 즉흥성에 빠지다

by 정가네요 2019. 8. 9.

<펌>

http://www.segye.com/newsView/20190214004274?OutUrl=daum


권태로운  인간관계,  즉흥성에  빠지다  [대한민국  신인간관계  보고서]

박모(46)씨는 최근 대학 동창이 보낸 메시지를 ‘씹었다’. “A랑 연락이 됐는데, 다음 달에 같이 한번 보자.” A는 언제 마지막으로 만났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친구. 학교 다닐 땐 제법 친하게 지냈지만 졸업 후 자연스럽게 멀어져 이제는 얼굴도 가물가물하다. “만나면 일단 반갑긴 하겠죠. 하지만 그때 뿐이지 않을까요. 형식적으로 소식을 주고받을 수도 있겠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기도 하고…. 답을 안 했더니 친구들도 더는 연락이 없어요.”


박씨는 이 일이 있고 나서 가끔 연락하며 지내는 친구들과의 관계도 억지스럽지 않게 끊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게 됐다. 동창 모임 멤버 7명 중 정말 편한 친구는 2명. 나머지 5명은 1년에 두어 번 술자리에서나 만난다. 그는 14일 “20년 전 대학생활 말고는 공유할 만한 게 거의 없으니 5명과는 지루하고 부담스럽기조차 한 게 사실”이라며 “갑자기 연락을 끊기도 그런 것 같아 약간 고민이다”라고 털어놨다. 

박씨는 자신의 증상(?)이 ‘관태기(관계+권태기)’의 표현일 것이라는 데 동의했다. 20·30대의 전유물처럼 인식되기도 했으나 인간관계에 대한 권태와 회의감은 중·장년층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혈연·지연·학연 등 어떤 끈이라도 붙잡고 ‘끈끈한’ 관계를 만들어 사회생활의 지렛대로 삼는 게 생존전략이자 미덕으로까지 여겼던 한국사회인지라, 역설적으로 관계에 대한 회의는 더 강력하다. 기존의 관계를 점검하고 구조조정에 나선 이들이 ‘혼자’로만 남길 원하는 것은 아니다. 이전과는 다른 즉흥적이고, 비연속적이며, 밀도가 약한 ‘티슈인맥’이란 말로 대표되는 새로운 형태의 관계들이 곳곳에서 등장했다.

◆인간관계에 지친 현대인, 아웃사이더 자처 

최근 몇 년 사이 한국인들의 인간관계에 대한 피로감 호소는 뚜렷하게 나타난다. 대학내일20대연구소의 ‘관태기를 겪고 있는 20대의 인간관계 인식 및 실태조사’(2016년 20대 남녀 643명 대상)에 따르면 연락처에 등록되어 있는 지인 중 편하게 연락할 수 있는 사람의 비율은 7.9%에 불과했다. 등록된 10명 중 ‘편하다’고 꼽을 만한 이들이 1명도 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처음 만나거나 그리 친하지 않은 사람과의 만남을 의도적으로 피한 적이 있다는 대답은 50.1%에 달했다. 

인간관계를 최소화하며 ‘자발적 아웃사이더’를 자처하는 이들이 절반 정도에 이른다는 설문도 있었다. 아르바이트포털 알바몬이 대학생 889명, 직장인 22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2017년 조사에서 대학생의 45.8%, 직장인의 55.6%가 자발적 아웃사이더 생활을 한 적이 있다고 대답했다. 이런 생활을 하는 이유로는 ‘혼자 다니는 게 편해서’(대학생 67.6%, 직장인 71.8%)를 가장 많이 꼽았으나 ‘인간관계에 지쳐서’(대학생 22.3%, 직장인 39.5%)라고 대답한 응답자도 적지 않았다. 자발적 아웃사이더 생활을 긍정적으로 보는 대학생들에게 그 이유를 물었더니, ‘인간관계로 스트레스를 받을 일이 없어서’(57.3%)라는 대답이 가장 많았다. 

대학내일20대 연구소가 대학 내 모임 실태를 조사한 지난해 조사(응답자 500명)에서는 55.5%가 ‘조원들과는 과제가 끝나고 나면 가급적 연락을 하지 않는 편’이라고 답해 지속적인 관계 맺음을 회피하는 경향이 뚜렷했다. 

이런 현상은 한국사회의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고, 각자도생이 일상화되면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심리적·경제적·시간적 여유의 부족에서 비롯된다는 분석이 유력하다. 김모(27·여)씨는 “자기계발을 하고 좋아하는 것만 하려고 해도 시간과 돈이 부족한데,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관계를 유지하겠다고 에너지를 빼앗기기 싫다”고 말했다. 

◆‘즉흥적 인간관계’에 빠지다 

취업에 성공해 고향을 떠나 서울에 집을 구해야 했던 홍현아(24·여)씨는 ‘셰어하우스’에 입주했다. 모르는 사람들과 공간을 공유해야 한다는 걱정이 들기는 했지만 다행히 룸메이트와 ‘궁합’이 잘 맞았고, 셰어하우스 멤버들과 이것저것 취미활동을 할 수 있어서 나쁘지 않다. 홍씨는 “ ‘어떻게 (모르는) 다른 사람들이랑 살지’ 하는 걱정을 했는데 이제는 (이곳을 떠나면) 같이 좀 더 이것저것 해볼걸 하고 생각할 것 같다”고 말했다. 

한 셰어하우스 포털에 올라온 인터뷰 내용 중 일부다. 셰어하우스는 “독립된 공간을 추구하면서도 고립되고 싶지는 않은 바람”에 힘입어 젊은 층에서 인기를 얻고 있다. 이처럼 ‘독립에 대한 열망’과 ‘고립의 거부’ 사이에 놓인 괴리를 메우는 새로운 관계들이 출현했다. 

‘티슈인맥’이란 말은 관태기, ‘인맥다이어트’ 등의 단어가 회자될 때 등장했다. 인간관계를 한번 쓰고 미련 없이 버리는 티슈에 비유한 것이다. 새로운 관계는 ‘비연속성’ ‘즉흥성’ ‘단발성’ 등을 특징으로 한다. 가족, 친척, 동문, 향우회, 직장 등 고정된 틀 내에서 긴 시간을 들여, 때로는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유지해야 하는 기존의 관계와는 완연히 다른 양상이다. 

김난도 교수가 이끄는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는 이런 흐름을 ‘대안관계’로 부르며 인간관계가 “한정된 자원을 합리적으로 배분하는 경제활동을 닮아가고 있다”고 분석했다. 각자가 가진 돈과 시간을 자신의 취향, 가치에 따라 선택한 모임에 투입한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과는 친해지는 과정을 생략하기도 하며 목적의 완수를 위해 열심히 즐긴 뒤 미련 없이 헤어진다. 

 

이런 경향을 잘 보여주는 것이 요리, 등산, 공연관람 등 갖가지 여가활동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인터넷 사이트들이다. 이를 이용하면 알맞은 날짜와 가격을 선택해 해당 활동을 부담스럽지 않게 즐길 수 있다. 하루를 단위로 운영되는 ‘원데이클래스’도 비슷한 맥락이다. 취향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 짧게는 한 달 정도 운영되는 ‘기간제 취향 살롱’ 같은 것도 있다. 

대학내일20대연구소는 지난해 말 발간한 ‘트렌드 MZ 2019’에서 “사회경제적 관계의 연대감이 옅어지면서 취향 위주로 구성된 가벼운 관계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고 밝혔다. 

◆ '관태기' '티슈인맥'… 신조어로 보는 새로운 인간관계 

사회 변화는 그전엔 없었던 말들로 종종 규정된다. 그것은 새로운 현상을 쉽고 간단하게 이해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인간관계에 지쳐 즉흥적이고 비연속적인 만남에 대한 욕구가 높아진 최근의 세태 또한 마찬가지다. 

몇 년 전부터 회자된 ‘관태기’(인맥의 유지나 관리에 피로감이나 회의감을 느끼며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에도 부담을 느끼는 상태)나 ‘티슈인맥’(‘티슈’와 ‘인맥’의 합성어. 쓰고 버리는 티슈처럼 필요할 때만 소통하는 일회성 인간관계), ‘인맥다이어트’(‘인맥’과 ‘다이어트’의 합성어. 번잡한 인간관계에 따른 스트레스나 바쁜 생활 때문에 의도적으로 인간관계를 정리하는 행위) 등은 이제 ‘신조어’라고 하기 어색할 정도로 일상화되었다. 
‘인간관계 O2O’란 단어도 있다. 오프라인에서 필요한 인간관계를 온라인에서 찾아서 해결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온라인에서 같이 밥을 먹거나 스터디 할 사람을 찾는 것은 물론이고 취미생활을 할 친구도 찾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랜선∼’이란 말도 흔히 쓰인다. ‘랜선집사’가 대표적이다. 인터넷을 통해 다른 사람이 키우는 고양이의 사진, 동영상 등을 즐겨보는 사람을 말한다. ‘랜선이모’, ‘랜선남친’ 등은 선호 대상만 달리할 뿐 인터넷으로 자신의 호감을 표출하고, 적은 비용으로 필요한 관계를 맺는다는 점에서 같은 의미를 가진다. 


‘가취관’은 ‘가벼운 취향 위주의 관계’라는 뜻을 갖고 있다. 예전에도 관심사나 취미 등을 매개로 만들어진 관계가 많았으나, 더 쉽고 가볍게 모임을 만들고 그만큼 쉽게 흩어진다. 또 관계의 주제가 무겁지 않고 작고 소소하고 특이한 것들이 많다. 취미라기보다는 흥미에 가까운 주제라 활동주기도 짧다. 

필요에 따라 단기계약직, 프리랜서 등을 채용하는 고용 형태를 가리키는 ‘긱 이코노미’(gig economy)는 인간관계에도 한정된 자원을 합리적으로 배분하려는 경향을 보여주는 단어로 언급된다. 평생 일자리가 사라지는 것처럼 영원히 변하지 않는 관계도 존재하기 어렵다는 현상을 설명하는 데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