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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 읽을거리

버들치를 기르는 시인 / 안도현

by 정가네요 2019. 7. 19.


* 버들치를 기르는 시인 / 안도현

 

 

 


  버들치라는 물고기가 있다네.


  강버들 밑에서 노는  것을 좋아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네. 이 밖에도 버들치에게는  많은

이름이 있네. 지방에  따라서는 버드랑치, 버들피리, 버들챙이, 중고기, 중치,  중태기, 중피리 등으

로 부르기도 한다네. 산골짜기의 맑고 찬 1급수에 사는 대표적인 어종 중의 하나라네.


  버들치를 기르는 시인이 하나 있다네.

  시를 쓰는 것을 좋아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네. 이 밖에도 시인에게는 많은 이름이 있네.

어떤 사람은 시인을 글쟁이,  문인, 문사, 작가, 철 덜 든 인간, 속없는  인간, 현실 부적응자, 주정

뱅이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네.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에 사는 가난한 인간 중의 하나라에.


  시인은 지난 여름 지리산 달궁 계곡에 갔었네. 이 세상의  우글거리는 인간을 피해 산을 찾아갔

건만, 거기에는 더 많은 인간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네. 시인은  기분이 언짢았지만, 물 맑은 계곡에

서 바짓가랑이를 걷어올리고 오랜만에 시심을 가다듬고 있었네. 그때  계곡 건너편에 자리를 잡고

텐트를 친 청춘 남녀 한 쌍이 소리를 질렀네. 그들은 물 속을 들여다보고 있었네.

  “와아, 여기에 물고기들 많구나.”

  “저게 무슨 고기야, 자기?”

  “피라미들이지 뭐.“

  “자기, 우리 오늘 저녁에 저것들 잡아서 매운탕 끓여 먹자.”

  “그거 참 좋은 생각인걸.”


  갑자기 시인은 슬퍼지기 시작했네. 젊은 청춘들이 너무 한심스러웠네. 살아 꿈틀거리는 것은 무

엇이든지 잡아 잡수려는 그  욕식 동물적 본능도 한심스러웠지만, 물 속에서 떼지어  노는 것들을

무조건 피라미로만 부르는  그 무식함이 더 한심스러웠네.  그 한심한 친구가 무심코  피라미라고

부르는 그 물고기는 버들치였네.


  `까짓것, 한낱  자잘한 민물고기에 불과한 것들이  버들치면 어떻게 피라미면 어때?  그게 무슨

대순가?`

  이렇게 함부로 말을 내뱉으면 곤란하다네. 그러면 시인은 더욱  슬퍼져서 소리내어 울지도 모른

다네.

  풀에 대하여, 들꽃에 대하여,  나무에 대하여, 새에 대하여, 곤충에 대하여,  물고기에 대하여 가

장 많이 아는 사람이 진정한 시인이라고, 시인은 생각한다네. 그리하여 가장 많이 아는 사람이 가

장 많이 느낄 수 있다고, 시인은  생각한다네. 어떤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이름을 정

확하게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시인은 생각한다네. 시라는  것은 무엇인가? 시란, 존재의  본질을

실감나게 드러내는 이름을 붙이는 일이라고, 시인은 생각하다네. 삶의 이유와 방식이 제각기 다른

존재들을 시인은 구별할 줄 안다네. 버들치와 피라미를, 진달래와 철쭉을, 산수유와 생강나무꽃을,

쑥부쟁이와 구철초를, 장수하늘소와 딱정벌레를, 그래서 시인은 버릇처럼 말한다네.


  - 영희와 영자를 구별하지 못해서야, 쯧쯧.

  - 철수와 민수를 구별하지 못해서야, 쯧쯧.


  시인이 버들치를 기르겠다고 했을 때 가족들은 이구동성으로 말렸다네.  그렇지 않아도 개 콧구

멍같이 좁은 집안에 대형 수족관을 들여오겠다고 하니 기를 쓰고  아내가 반대를 할 법도 하였네.

몸 빛깔이 아름답고 현란한 열대어라면  몰라도 흔한 민물고기 중의 하나인 버들치를 기르겠다고

하니 아이들이 반대를 할  법도 하였네. 시인은 아내와 아이들을 설득하기 위해  어류도감을 펼쳐

보여주었네. 버들치는 정말 못생겼다네. 누르스름한  것 같기도 하고 거무튀튀한 것 같기도 한 등

짝의 빛깔부터 가족들에게 점수를 따지 못했네. 아주 뾰족한 못  끄트머리로 콕 찍어놓은 듯한 새

카만 눈도 쉽게 정이 가지 않기는 매한가지였네. 시인은 마지막으로, 버들치가 1급수에 산다는 것

을 특히 힘을  주면서,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말했네. 시큰둥해  있던 아내가 그제야 즉각 반응을

나타냈네.


  “그렇다면 아주 깨끗한 물고기네요.”

  평소에 1등과 1등석과 1류를 선호하는 아내 덕분에 시인은 버들치를 기르게 되었다네.

  가까운 교외의 계곡을  훑어 겨우 버들치 몇 마리를  잡아온 날, 버들치들은 수족관 바닥  한쪽

구석에 대가리를 처박고 사시나무  떨듯 발발 떨었네. 아무리 들여다보며 눈을 맞추려고  해도 떨

기만 했네. 먹이를 주어도 먹지 않았네.  한 시간이 지나도, 두 시간이 지나도 버들치들은 떨었네.

시인은 밥 먹는것도 잊어버리고 버들치를 바라보았네. 식은 밥이 굳어갔네. 시인은 불안해지기 시

작했네. 하루가 지나도, 이틀이 지나도 버들치들은 떨었네. 시인이  넣어준 먹이가 물에 적신 건빵

처럼 퉁퉁 불어터진 채 떠다녔네. 시인은 시를 쓰는 것도 잊어버리고 버들치를 보라보았네.

  원고 독촉 전화가 자꾸  걸려왔네. 시인은 전화 받는 것도 아예 잊어버리고  버들치를 바라보았

네. 바라보고,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네.


  그러자 시인의 아내와  아이들도 수족관 속을 바라다보며 버들치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네.

관심, 그것이 사랑의  시작이었네. 버들치들이 미끈한 몸을 보여주며  헤엄치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때부터였네.

  한 달이 지났네.

  시인이 먹이를 넣어주려고  가까이 가면 버들치들이 미리 알아보고 시인  가까이로 몰려들었네.

시인은 버들치를  기르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네.  재빨리 꼬리지느러미를 흔들며 수면으로  떠올라

먹이를 채어 먹는 활달한  몸짓도 보기 좋았네. 짝짓기를 하려는지 저희끼리 수초  사이를 오가며

장난을 치는 모습도 사랑스러웠네.

  일 년이 지났네.


  버들치를 기르는 시인은 여전히 행복했네. 버들치가 들어 있는 수족관은  깊은 산 계곡 물을 한

토막 뚝 떼어 집안에다  옮겨놓은 느낌이었네. 시인은 자연과 함께 어울리는 자기  자신이 은근히

자랑스러웠네.

  하루는 시인이 수족관에 눈을  바짝 갖다붙이고 바라보고 잇을 때였네. 한 버들치가  입을 오물

거리며 시인에게 말했네.

  “이 수족관은 길이가 116센티미터, 높이가 45센티미터, 그리고 폭이 25센티미터군요.”

  아아, 시인은 가슴이 아팠네.  도둑질을 하다가 들킨 사람처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네. 버들

치라는 이름의 자연에게 관심을 보인다는 것이 결과적으로 자연을 울타리속에 가둔 꼴이 되고 말

았기 때문이라네. 시간이 흐를수록 버들치 뱃속의 부레는  길이 116센티미터, 높이 45센티미터, 폭

25센티미터의 공간에 길들여질 것이었네. 당장 버들치들을 원래 살던  곳에 다시 풀어놓는다 해도

이들은 물 속에서  수족관 크기의 공간에서만 헤엄을  칠지도 모르는 일이라네. 시인은  버들치를

길러온 일이 후회가 되었네. 아니, 그 동안 버들치를 길러온 게 아니라 가두어왔다는 죄책감이 시

인의 가슴에 따가운 회초리를 갖다대고 있었네.

  `내가 너희를 감옥 속에 가두었구나.`

  시인은 진심으로 말하고 싶었네.

  버들치가 다시 말했네.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갇혀 있는 건 우리들뿐만이 아니잖아요?”

  “뭐라고?”

  “우리가 보기에는 수족관 바깥도 감옥처럼 보이는걸요.”

  “그래도 나는 너희보다 자유로운 몸이야.”

  “그러면 가고 싶은 곳을 어디든지 갈 수가 있나요?”

  “글쎄, 그건 좀...”

  “그래요. 사람들은 발길이 닿는 대로  갈 수가 있다고 착각을 하지요. 사람들의 발걸음이 시작

되는 곳에서 끝나는 곳까지가 감옥의 내부라는 걸 모르고 있다구요.  가고 싶은 곳을 지금 막바로

갈 수가 없다면 그건 감옥 속에 있다는 뜻이지요.”

  시인이 버들치를 기르는 게 아니었네.

  수족관의 버들치가 세상이라는 감옥 속의 시인을 기르고 있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