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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 소개

『초록 나비』 - 김연화

by 정가네요 2023. 1. 14.


지인이
시집 한 권을 보내왔습니다.

이미 4년 전에 낸 첫 시집인데
미처 제때에 못 보냈다는 겁니다.^^

『초록 나비』 - 김연화

혼자서 읽고 말려다가
두어 편을 읽고 나니 문득 다른 사람에게도
소개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습니다.
밤늦도록 모두 읽고 잠에 들었습니다.

*
빈 집 / 김연화
고샅길 초입 느티나무 숲이 있었다 작은 내를 끼고 가파른 언덕을 지나야 마중 나오는 늙은 집 나보다 두 살 위인 소몰이꾼이 무화과나무 잎에 몸을 숨긴 채 기타와 하모니카를 연주해 주던 뒤란 백작약 꽃을 뿌리째 뽑아 흙과 함께 비닐봉지에 싸서 열두 살 가슴에 안겨주던 날이 역마살 짙은 바람으로 떠돈다 새들이 흔들어놓은 미루나무 숲길을 역류해 작약 뿌리에 매달린 ‘매기의 추억’ 하모니카 소리가 내 무릎 치마에 휘감길 때까지 걷는 미루나무 숲 서른 해나 지난 세월이 머리를 헤치고 흰 사슴을 몰고 나에게로 올 거라는 생각을 했다 새벽 4시면 교회 종탑에서 잠 덜 깬 종소리가 쏟아져 내리고 성경책을 끼고 사립문을 여시던 엄마는 나의 바다 빛깔 물방울무늬 그려진 원피스 마무리하지 못한 채 서둘러 별을 따라 떠나셨다 흔들리는 언덕 위 벽오동잎 무리 지어 무너져 내리는 어스름이 오면 이슬 맺힌 풀잎마다 수리부엉이가 울었다 그 긴 세월 흔들리는 고샅길 휜 그림자 너머 상현달이 뜬다 달의 이마 위 새겨진 그리움 하나 빈집이다 빈집 가득 달빛이 남긴 그늘 두텁게 쌓여 있다.

*
봉화역 / 김연화
내가 태어난 마을은 역이 있는 읍내 마을이었다
역 대합실에는 작은 매점이 있었는데 그 매점은
기차가 들어올 때만 문이 열리고 전등이 켜지고
기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그 매점에서 저마다
종합선물세트라든지 과일이라든지 술을 사서
신작로로 나와 윗길로 아랫길로 흩어지곤 했다
기차가 지나가고 나면 다시 불이 꺼지고 문이
잠기곤 했다
우리 집 마루에서 놀다가도
기차소리가 나면 달려가던

*
우리가 늙은 어느 날에는 / 김연화
당신과 내가 아득 먼 곳에 살아
첫눈이 함박눈으로 쏟아진다고
편지를 드려도
당신께선 아무 말씀 없으셨습니다
봄 되어 이곳에 피는 생강나무 꽃이
당신 계신 곳에도 피고
여름 되어 당신과 함께 오르던
비봉산 언덕배기
호박잎이 이곳에도 무성했는데
지금 창밖엔 검불 같은 눈이 흩날리고
내 가슴에는 당신만 수북 쌓여 갑니다
우리가 늙은 어느 날에는
당신 가슴에 나도 눈발로 흩날릴까요

*
겨울 들녘 / 김연화
배춧값 폭락으로
걷어 들이지 못한 밭에
까치들 걸어 다니며
언 배추 쪼아 먹고 있었다
그날 나도 저녁찬
생배추 된장 찍어 먹었다
까치와 한 상에서 밥 먹었다

*
흑백사진 / 김연화
태안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신진도까지 갔다 차장이 있는
버스는 육십 년대를 떠올리게 한다
버스는 가끔씩 바다가 보였다가 사라지고 보였다가 사라
지는 국도를 구불구불 곡예를 하다가 겨우 신진도에 닿았다
낚시를 하러 서울에서 내려온 가족들의 모습도 보였다
신진도에서 가이도까지 가는 여객선이 막배였던 관계로
섬에 내려보지도 못하고 바다 구경만 하다가 돌아왔다 망망
대해에 떠서 물보라를 일으키던 한 마리의 짐승 뒤에서
선착장 가까운 곳에 건어물을 파는 점포가 늘어서 있다 맛
보기로 내놓은 건어물들이 입맛을 당기게 했다 몇 가지 건어
물을 사고 거스름돈을 주고받다가 눈이 마주친 어물전 아주
머니는
“오늘따라 섬과 바다가 참 고요하지요” 고개를 들고 바라
보니 신진도는 흑백사진으로 걸려 있었다
어물전 아주머니의 화장기 없는 모습에는 세월이 담겨 있
었다 눈이 내리는 날 눈이 내려서 세상이 흰 고요 속으로
잠기는 날이면 그냥 꺼내보고 싶은 풍경이 되어